* 현대au
* 카일로레이가 남매입니다
* 근친소재주의
* http://wntpng.tistory.com/100 에서 이어집니다
*
레이는 때때로, 문지기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이 문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준비된 문이오. 카프카의 심판은 카일로 렌이 레이의 손에 쥐어준 첫 책들 중의 하나다. 단 한번도 먼저 열렸던 적 없는 형제의 방문을 그녀가 스스로 열어젖히던 날의 일이었다. 손가락으로 나이를 다 셀 수 있던 시절의 아이에게 이미 성인에 가까울 정도로 자라 버린 큰 남자는 사실 남매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멀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 덜 자란 혀가 발음하는 그 어색한 단어가 울릴 때마다 남자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웃곤 했다. 부모도 들어갈 수 없는 그 방에 그녀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음을, 스스로의 자랑거리로 여길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레이는 눈을 떴다. 시야는 완벽하게 그 커다란 몸에 가려져 있었다. 이마에 흐트러진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치워내는 손의 체온은 아직 바깥의 공기가 스며든 것처럼 차갑게 식어 있다. 그 손이 뺨에 닿자 냉기가 더 뚜렷해 레이는 약간 몸을 움츠렸다. 카일로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와 레이의 코 끝을 스쳤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남자가 발음하는 그녀 자신의 이름이 파고들어온다. 레이는 그 침입에 대해 수용도, 저항도 하지 않았다. 얇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상대의 젖은 온도는 그 손과 다르게 녹을 것처럼 더웠다.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레이의 손가락은 카일로의 목덜미를 지나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도 체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스며든 인공적인 머스크. 베이스 노트가 드러나기 전 제 몸에 향수를 들이붓는 버릇도 여전하다는 뜻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얽혀드는 검은 머리카락의 감촉은 베일 것처럼 뻣뻣하고 날카롭다.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숨마저도 이미 누구의 것인지조차 모르게 섞여 있는 채였다. 몇 년이 지나도? 레이는 스스로를 비웃는다. 애써 부정해 왔던 조각들이 그녀의 의식 안에서 퍼즐처럼 맞물려 하나의 문장을 만든다. 여기서 전혀 변하지 않을 미래를, 상정하고 있을, 정도로, 그녀에게 스며들었다는, 뜻, 이, 아닌가.
*
그의 여동생은 사막이었다. 아니. 카일로는 정정한다. 그의 여동생은 사막 같은 사람이었다. 단어의 무게는 그렇게 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쉽게 가벼워진다. 작열하는 태양, 생명을 말려 죽이는 온도. 아무리 걸어도 끝에 다다를 수 없는, 그리고 자신이 어딜 향해 걸어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막. 숨 쉴 때마다 폐 깊은 곳까지 파고들 것만 같은 모래와 흙이 파고들어 찢기는 듯한 고통. 그가 갖지 못한 열기였다. 그가 무엇을 하더라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카일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가 어디서 죽어야 할 지를 알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레이의 시선에서, 그의 숨이 말라 죽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을 때 부터의 일이었다.
무엇 하나 닮지 않은 남매였다. 학교를 함께 다닐 수 없는 나이의 간격은 외부 세계에서 그들을 쉽게 갈라놓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남매의 왕국은 그들이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이 집에 세워져 존재한다. 카일로는 철의 장벽을 세우고, 제 목에 족쇄를 채운다. 한쪽 끝은 가냘픈 발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삶, 그의 죽음. 카일로 렌은 사막에 묻혀 죽고 싶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그 곳이었다. 그가 이해받을 수 있는 곳도 그곳뿐이다. 카일로는 조소한다. 닮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해가 진 후의 사막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지 못한다.
카일로는 결국은 그의 곁으로 돌아온 레이의 손끝으로부터 외로움을 읽는다. 그 어디를 헤매어도 채워지지 않았던, 이해받지 못했던 데 대한 서글픔을 발견한다. 그녀는 빼앗는 법 외엔 알 수 없도록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자들은 모조리 소모당하고, 사그라든다. 물론 그것은 레이의 본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한다 주장하는 이들이 무엇을 해도, 레이의 마음은 채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카일로와 마찬가지로 레이는 채워질 수 없는 고독을 안고 태어났다. 태생적인 결핍이었다. 잘못된 부모를 가진 것도, 사랑을 부족하게 받은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었다.
*
어린 아이였던 시절의 카일로 렌은 완벽의 결정체 같은 생물이었다. 아니, 그랬다고 한다. 카일로는 그 시절의 자신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사진 속의 남자아이와 그의 주변인들이 묘사하는 그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는 뜻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였지. 아주 똑똑했단다. 혼자서도 무엇이든 잘 했어. 애교도 많고, 착한 아이였지. 적당히 말썽도 부렸지만 귀여운 수준이었지!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 같은 아이를 낳고 싶다고 나에게 말하곤 했단다.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너를 키우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었어. 하루하루 너무 빨리 자라는 게 슬플 정도였단다, 벤.
벤. 한때는 그런 이름이었다. 카일로는 제 어린 시절의 이름을 낯설게 되새긴다. 그 시절의 기억은 모든 것이 모호하다. 꿈을 기억하는 것처럼 불확실하고, 타인의 이야기로 구성된 기억들에 불과하다. 어디가 미화되었고 어떤 곳이 삭제되었는지 알 수 없는 기억들이 그의 뇌에 얼룩처럼 새겨져 있는 것이다.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은 이제 알아볼 수 없는 형체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시절의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고, 말한다. 카일로는 그 사실에 대해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벤, 너에게 동생이 생길 거야. 학교에서 돌아온 그에게 그렇게 말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너라면 좋은 형이 될 게 분명하지. 그 말에 대해 어머니가 했던 말은 분명하게 기억이 났다. 오빠가 될 수도 있다구요. 물론, 좋은 오빠가 되겠지만. 동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도 전에, 그는 오빠가 되었다. 눈도 뜨지 못하던 작은 아기는 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반사적으로 쥐었다. 인사해야지. 너의 여동생이란다. 반쯤 뜨인 눈의 안쪽은 반절이 짙은 흑색이었다. 까맣고 매끄러운 동공이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로 흔들린다. 그를 보는지, 다른 곳을 보는지를 알기 힘든 움직임이다. 아기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카일로는 질문했다.
"절 보고 있는 건가요?"
"아니. 신생아는 아직 아무것도 볼 수 없단다."
기껏해야 아주 가까운 데서 뭔가 움직이고 있다, 정도겠지? 아이의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흔들며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카일로는 고개를 숙여 아기의 눈을 본다. 검은 눈동자에 비친 것은 그의 얼굴이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에 투사된 스스로의 모습이 지독하게 낯설었다. 그를 그 무엇으로도 판단하지 않는 눈. 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그를 무엇으로도 정의내리지 않는 눈. 카일로는 아직도 그 눈에 비친 그 자신을 처음으로 인지했을 때의 감각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카일로 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인지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눈 안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 그의 본질이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아직 아이 이름도 정하질 못했네. 언제까지 태명으로 부를 수도 없고. 벤, 어떻게 생각하니? 카일로는 아기의 깜박이는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한다. 레이. 레이가 좋아요. 카일로는 조심스럽게 아기의 손을 쥐어 보았다. 아직 덜 자란 그의 손 안에도 충분히 잡힐 정도로 작고 연약하다. 네가 내게 나를 주었으니, 나도 너에게 너를 주는 거야, 레이. 카일로는 다시 한번 소리내어 그의 여동생이 갖게 된 이름을 불렀다. 안녕, 레이.
이것이 카일로 렌이 가진, 생의 시작에 대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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