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으로 짧게 되뇌인 문구는 타인의 것처럼 멀었다. 레이는 차갑게 식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차례차례 누른다. 삑, 삑, 소리는 정확히 일곱 번 울렸다. 불이 꺼진 집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그녀는 지옥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린다. 레이의 지옥은 정확하게 이 집의 넓이만큼의 크기였다. 떠오르는 것마저도 결국은 퀘퀘묵은 문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그 구절을 읽어준 것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하면, 레이는 그 남자의 귓가에 단테의 싯구들을 하나씩 새겨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집 안은 여느 때처럼 어두웠다. 나지막히 울리던 레이의 발걸음 소리는 이내 두껍게 깔린 카페트에 묻혀 죽었다. 거실은 며칠이나 난방을 하지 않은 것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체 보관소에서 어울릴 것 같은 온도였다. 레이는 익숙하게 엉망으로 배열된 가구들을 피했지만 그녀의 기억과 달리 바닥에 흩어져 있는 책들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렇게나 펼쳐진 페이지들은 짓밟힐 때마다 우그러지거나 찢기는 소리를 냈다. 거실을 가로질러 그녀의 방 안에 들어갈 때까지 발 아래 밟힌 책의 수는 여덟 권이었다. 어떤 의미도 없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녀의 방 안은 레이가 이 집을 떠났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날 아침 치우지 못한 침대, 열린 옷장 문, 읽다가 덮어 둔 책과 켜져 있는 스탠드. 그러나 천천히 숨을 들이쉰 레이는 이 곳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지독한 향수의 베이스 노트가 이 방 안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 그녀의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머스크에 레이는 짧은 현기증을 느끼며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체온을 감싸던 두터운 외투를 벗자 시린 냉기가 목 안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추위는 레이에게 있어선 단 한번도 익숙해진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레이는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더 늪 안에 빠져드는 것처럼 어지러워졌다. 고개를 숙인 채로 손바닥으로 눈가를 몇 번이고 꾹꾹 눌러보지만 쓰린 눈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입 안쪽에 이를 세워 누르자 둔한 통증이 퍼졌다. 그녀의 몸에는 추위 탓에 잔뜩 소름이 돋은 채였다. 이곳은 지옥이고, 그녀는 결국 이 곳으로 다시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숨이 막힐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에,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돌아왔구나."
스탠드의 불빛만이 어둠을 간신히 밝히는 중에도 남자의 검게 죽은 눈만은 지나치게 뚜렷해서 그녀는 결국 그와 시선을 피하고 만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은 그녀가 떠났을 때보다 조금 더 길어진 것처럼 보였다. 약간 갈라진 저음. 기억하는 것보다 더 도드라지는 얼굴의 선과 문가를 붙잡은 긴 손가락들은 더 가늘어져 있었으나, 레이는 남자의 존재감이 그녀의 방문 앞을 완전히 가로막은 것 같다고 느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것처럼. 레이는 천천히 숨을 쉰 후, 이 집을 지옥으로 만든 남자와 다시 한 번 눈을 맞춘다.
"다녀왔어, 오빠."
*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일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레이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카일로의 침대는 지나칠 정도로 푹신해서 레이는 매일 밤 빠져 죽는 꿈을 꿔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죽는다면 바다에 빠져 죽고 싶다고 말한 것은 열 다섯 살의 소년이었다. 혹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지금의 자신이거나. 그녀의 옆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비어 있었으나 레이는 밤새도록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온기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음을 느낀다.
큰 창문을 가린 몇 겹의 두꺼운 커튼을 걷어내자 그제서야 방 안에 빛이 들어왔다. 빛에 노출된 카일로 렌의 방은 어쩐지 햇빛에 잔뜩 움츠러든 것처럼 보였다.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수많은 책들, 구겨진 종이들. 잠들 땐 발견하지 못한 번진 푸른 잉크자국이 시트 한쪽에도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텅 빈 커피컵들 중 손에 잡히는 것 몇 개를 손가락에 끼워든 레이는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가볍게 몸을 빼냈다. 그녀의 기억 안에서 경첩이 망가져 있던 카일로의 방문은 여전히 그대로여서, 예전과 똑같이 절반 이상으로 활짝 열리는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책을 한 권도 밟지 않고 거실을 건너 부엌으로 향하자 진한 커피 냄새가 풍겨왔다. 카일로는 테이블에 팔을 괸 채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레이가 손에 들고 있던 커피컵들을 싱크대에 쏟아붓는 요란한 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안경테로도 가려지지 않는 창백한 눈가는 오전이란 시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카일로에게 손을 흔들어준 레이는 냉장고를 열었다.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이것저것 들어 있었다. 청크 초콜릿이 가득 든 머핀을 발견한 그녀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가장 큰 머핀 하나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고 커피를 따르러 간 사이에 그녀의 아침식사는 이미 카일로의 손 안에 잡혀 있었다. 레이는 짧게 한숨을 쉬곤 조금 거친 동작으로 냉장고 문을 열어 머핀 두 개를 더 꺼냈다. 카일로의 큰 손 안에서 초콜릿 머핀은 애처로울 정도로 작아 보인다. 레이는 머핀을 한 입 크게 베어문 후 커피를 마셨다. 머신으로 아무렇게나 내린 커피였지만 원두가 좋은 탓에 맛은 나쁘지 않았다. 카일로는 설탕을 반쯤 쏟아붓기 전엔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남자였기에, 레이는 그 원두를 사다놓은 것이 제 혈육이 아님을 알 수 있었으나 굳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결국 모든 것이 그녀가 집을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나가지 않는 게 좋겠군."
레이가 두 개째의 머핀을 집어들었을 때 카일로가 한참 만의 침묵을 깨고 말했다. 레이는 잡았던 머핀을 내려두곤 인상을 찌푸렸다. 묶지 않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영 거슬렸다. 어젯밤 머리끈을 어디에 뒀더라.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에 긴 손가락을 끼워넣고 머리를 풀어내렸던 것은 눈앞의 남자였다. 카일로는 이미 어딘가에 외출할 것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얼굴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쓴 검은 안경은 의도와 달리 그의 인상을 더욱 위험해 보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레이는 나지막히 왜, 하고 의미없이 되묻는다.
"어제보다 훨씬 더 추울 테니까."
"누가 그래?"
카일로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읽던 책과 마시다 만 커피를 그대로 둔 채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은 어딘지 현실감이 없었다. 레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손을 뻗어 카일로가 읽다 만 책을 집어들었다. 아침부터 카프카라니. 레이는 첫 장을 펼쳤다. 카일로의 손끝이 몇 번쯤 스쳐간 페이지의 끄트머리가 약간 구겨져 있었다. 오늘은 나가지 않을 예정이니, 세수하기 전에 독서를 시작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집 안은 창문을 열고 싶어질 정도로 뜨거웠다. 어젯밤의 냉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레이는 고개를 흔들고 책에 다시 집중한다. 첫 문장을 다 읽는 데에, 지독히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