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트라팔가 로우 오른쪽 앤솔로지에 냈던 글입니다.
* 다시 이렇게 쓰라면 못 쓸 글이네요 ㅠㅠ 간만에 발굴하여 웹공개합니다.
* 공백포함 약 3만5천자.. 깁니다(...)
* 키드로우
* 약 10년 후의 미래
Traumerei
Eustass Kid / Trafalgar Law
Written by 노쓰군
0.
모든 것은 권태로부터 시작되었다.
1.
‘죽음의 외과의’ 트라팔가 로우와 유스타스 '캡틴' 키드, 두 사황 사이의 반목은 이제 이 바다에서는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9년 전, 이 바다의 주인이 없던 시절 이루어진 샤봉디 제도에서의 첫 조우 이후 두 해적단 사이에서 벌어진 수많은 일들이 그들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고, 수많은 사건들이 해적과 해군, 일반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며 소문에는 살이 붙었고 그들에 관한 날이 선 가십은 끊이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아덴 섬에서 벌어졌던 1년 전의 참사는 지금까지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사건이었다.
웨스트 블루의 수많은 제도들로 가기 위한 여러 항로가 겹치는 요지에 위치해 있던 섬인 아덴은 오랫동안 많은 해적들이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다. 수많은 해적들이 그 섬에 자신의 해적기를 꽂았지만, 가장 오랫동안 그 섬을 소유한 것은 현 사황인 트라팔가 로우였다. 사황의 이름을 얻기도 전에 바다에서 제 세력을 무서운 속도로 확장시켜 나가던 하트 해적단의 선장은 특히나 계획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한 전략과 전술에 능했고, 수많은 섬들 중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요충지가 될 만한 곳들을 정확하게 골라 제 것으로 삼곤 했다. 그런 그가 아덴을 노리지 않는다는 것은 데비 존스가 망자를 내버려 둘 확률보다 낮은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악명에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심미관의 샛노란 잠수함과 같은 색을 한 졸리 로저가 섬 전체에 새겨진 이후, 그리고 그 주인이 현 사황이 된 이후 아덴의 소유권은 영원히 트라팔가 로우의 통제 아래에 속해 있을 것 같았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던 이 바다의 평화를 깰 수 없을 것처럼. 밀짚모자를 제 상징으로 삼는 해적이 제 이름 앞에 왕의 권위를 붙인 이후 지속된, 그 무엇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사건들만이 일어나는 시대에서 그것은 당연한 예상일 것이다.
그리고 유스타스 키드는, 제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이 시대의 모두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안주하던 바다 전체의 평화를 얼마든지 산산조각낼 수 있는 유일한 해적이었다.
트라팔가 로우가 치밀하게 짜인 그물처럼 원하는 것을 제 손에 넣는다면, 유스타스 키드는 폭력으로 모든 것을 정복하는 남자였다. 키드는 그에게 굴복하지 않는 무엇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의 지배가 처참한 폐허밖에 남지 않는 것이라 해도 개의치 않았다. 마치 불길이 휘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불모지가 된 수많은 섬이 키드의 것이었다. 키드의 침략은 언제나 그렇듯 예고 없이 갑작스러웠다. 모든 금속을 제 몸의 일부처럼 다루는 그의 강대한 능력 아래에서 아덴의 질서는 종이처럼 쉽게 찢겨나갔다.
로우에게 소식이 전해진 것은 순식간이었지만 키드의 살육은 그보다 더 빨랐다. 섬에 도착한 로우는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그의 크루들의 시체가 부패하기도 전에 아덴의 항구에 정박되어 있던 키드의 배 네 척을 침몰시켰다. 산 채로 수장되어 영원히 떠오르지 않게 된 부하들의 목숨값으로 키드가 요구한 것은 아덴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의 목숨이었다. 두 사황의 지독한 싸움 끝에 결국 섬의 소유권은 유스타스 키드에게 넘어갔지만, 사실 그것은 트라팔가 로우 쪽에서 아덴을 버렸다고 하는 표현이 옳았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무수한 추측이 난무했으나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화로운 바다는 유스타스 키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뉴게이트의 죽음 이후 신세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던 것이 벌써 거의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 모든 변혁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올해로 서른 살이 되어 있었다. 트라팔가 로우가 3년 전에 지나쳤던 나이였다. 무료할 정도로 고요하게 흘러간 시간들이었다.
지난 역사에서 각 세력들 사이의 균형은 언제나 깨질 것처럼 위태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몽키.D.루피는 그 중심에서 우스울 정도로 쉽게 그 모든 것을 다루는 재주가 있었다. D의 이름을 가진 그 남자가 해적왕이 된 후 이 바다 전체가 평화라는 이름으로 지속하는 암묵적인 휴전은 언제나 키드를 숨막히게 했다. 그리고 그 평화에서 느끼는 갈증과 그들이 갖지 못한 이름과 호칭에 대해 트라팔가 로우와 유스타스 키드가 공유하는 허기와 상실은 그 증오의 연혁보다도 명확했다. 상대는 믿을 수 없지만 서로가 가진 열망은 신뢰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스타스 키드는 작년에 벌어진 아덴에서의 사건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트라팔가 로우가 손에 넣은 정보를 얻기 위해 그가 먼저 거래를 제안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트라팔가 로우가 키드의 연락에 3일만에 돌려준 것은 여전히 살아있는 채로 잘린 여자의 목이었다. 여자의 얼굴은 겁에 질려 엉망이었지만 키드는 며칠 전 하룻밤을 함께 보낸 여자의 금빛 머리카락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는 여전히 속내가 어두운 외과의의 질척한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새하얀 귓가에 단정하게 꽂혀 있던 편지는 원래는 소독약 냄새밖에 나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여자의 짙은 향수 냄새가 잔뜩 밴 채였다. 편지 안에는 날카로운 필체로 어떤 섬의 좌표와 함께 트라팔가 로우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키드는 로우의 성정을 지겨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고, 그는 몸을 돌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여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잇소리처럼 짓눌린 질문도 함께였다. 그 놈이 뭐라고 했지? 그 충격에 바닥에 나뒹굴며 터진 여자의 입술 사이로 새빨간 액체와 울음소리, 그리고 로의 전언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당연히 그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던 탓에 키드는 그 머리에 몇 번 더 발길질을 해야 했다.
-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떼어두고 와라, 유스타스야. 시끄러워지는 건 싫거든.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로우 특유의 호칭은 키드를 전혀 유쾌하게 만들지 못했다. 키드는 로우의 전언을 듣자마자 주저 없이 그녀의 머리를 다 읽은 편지와 함께 바다에 던져 넣었다. 트라팔가 로우는 키드에게 동료도, 무장도 없이 올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물론 키드는 기꺼이 그 혼자의 몸으로도 트라팔가 로우의 해적단을 박살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언의 내용 자체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 꿍꿍이에는 의심을 거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 역시 그 자신이 단신으로 키드 해적단을 궤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키드가 홀로 올 것을 요구할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었다.
서로의 의중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 정도의 깊이에서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경계선을 이룬 채 흔들리고 있었다. 키드는 짧게 혀를 찼다. 짜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결정은 빨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굳이 깊게 생각하는 것보다 일단은 그 함정에 걸린 척 해 주는 게 일을 빠르게 진행시키는 방법이라는 게 키드의 오랜 지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드는 킬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트라팔가 로우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노스 블루에서도 상당히 극지방에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 트라팔가 로우의 섬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요한 설원이 가득하고, 서늘하게 메말랐지만 섬을 뒤덮은 새하얀 눈과 그 사이마다 돋아난 침엽수림의 탓인지 황량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사람은 살지 않는 듯 했지만 키드는 생물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고, 아마도 추위에 적응한 채로 사는 겨울의 맹수들이 섬 안에 서식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가 잠시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만 주변 어디에도 동물의 발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섬에는 눈이 자주 내리는 모양이었다. 키드는 걸음을 옮겼다. 동행한 부하들은 모두 배에 두고 내린 탓에, 눈 위에는 키드의 검은 구두가 남긴 자국들만이 걸어온 길을 따라 길게 남아 있었다.
걷는 게 지겨워져 이 섬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그 고약한 면상이 직접 마중을 나오게 만들어볼까 생각할 때 쯤 숲이 끝났고, 거대한 호수가 키드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 건너편에 위치한 고성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그러시겠지. 그 놈은 그 편하기 짝이 없는 능력으로 움직일 테니까. 키드는 조소했다.
푸른 호수는 오랫동안 지속된 영하의 날씨에서 단단하게 얼어붙은 채였다. 두꺼운 얼음 아래로 물 밑이 보이지 않았다. 키드는 주저하지 않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어붙은 호수 위로 발을 내딛었다. 언제 발밑의 얼음이 부서져 그의 몸이 빠져나올 수 없는 물 밑으로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는, 어디선가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을 성격 나쁜 남자에 대한 분노가 그의 걸음을 빠르게 했다.
키드에게 고성의 거대한 성문을 열어 준 검은 점프수트의 남자는 어떤 인사도, 질문도 없이 그를 인도했다. 남자의 얼굴은 깊게 눌러쓴 모자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키드는 굳이 그의 생김새를 궁금해 하지는 않았다. 키드 해적단의 일원들이 서로 같은 모습을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하는 만큼이나, 트라팔가 로우의 것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그의 오래된 감상이었다.
성의 내부는 키드의 예상보다 넓었고, 몇 개의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는 동안 키드는 가끔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특이한 오브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를 안내하는 남자의 등에 새겨진 금색 졸리 로저가 신경을 건드리게 두는 것보다는 트라팔가 로우의 괴상한 심미관을 감상하는 게 차라리 나았던 탓이다. 날개처럼 펼쳐진 여자 거인의 새하얀 팔 한 쌍, 복도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온갖 색의 안구가 진열되어 있는 장식장. 어느 것이든 지독한 악취미였다.
한참을 걸어간 끝에 키드를 안내하던 남자는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키드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그는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그의 앞에 있는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하지만 이미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른 키드는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남자를 옆으로 밀친 후 문을 열어젖혔다.
키드의 갑작스러운 침입에도 불구하고, 방의 주인은 아무 놀라울 것도 없다는 듯한 그 특유의 읽기 힘든 무표정으로 방문객을 맞이했다. 그가 보인 반응이라고는 고개를 들어 키드를 흘끗 바라본 후 다시 시선을 내리는 것이 다였다. 꽤 편안해 보이는 거대한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앉아 있는 그의 무릎에는 반쯤 읽은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다. 키드는 방 안으로 들어와 허락을 구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긴 소파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거대한 방은 서재의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문에서 마주한 벽면의 거대한 창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곳은 빈틈없이 책이 꽂혀 있는 책장들로 들어차 있었다. 방 안은 책의 관리를 위해서인지 문 밖의 긴 복도보다 더 건조하고 서늘했다.
키드는 로우의 옆에 놓여 있던 은제 술잔을 그의 능력으로 끌어당겨 손 안에 쥐었다. 그와 로우는 비슷한 특징보다는 둘 사이의 차이를 찾아내는 게 훨씬 쉬운 관계였지만, 적어도 기절할 정도로 독한 술을 선호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키드가 잔을 반쯤 채운 럼을 비우는 동안 로우는 느긋한 움직임으로 읽던 책을 덮어 탁자에 올려둔 후 키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로우였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나?”
느긋한 말투와는 달리 베일 것처럼 벼려진 금빛의 홍채가 키드를 향해왔다. 키드는 로우가 만족할 만큼 새빨간 눈을 찌푸려 주었고, 로우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얇은 입술이 그리는 날카로운 선은 언제나처럼 기묘한 파괴욕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키드는 로우의 인사에 대답 대신 그가 방금 비운 술잔을 던졌다. 가장자리에 검붉은 립스틱 자국이 남은 잔은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다 인위적으로 방향이 뒤틀려 원래 주인의 손 안으로 돌아갔다.
트라팔가 로우와 유스타스 키드가 직접 얼굴을 대면한 것은 서로에게 각자 자신들이 소유했던 목숨의 값을 받아냈던 그 날 이후 약 1년 만의 일이었다. 로우의 모습은 키드의 기억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것보다 조금 더 말라 있었다. 원래도 그 악명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선이 가늘었던 몸이었지만, 앞섶이 반쯤 열린 검은 옷 안쪽으로 드러난 깊게 파인 목선과 쇄골이 그리는 직선들은 금방이라도 부러뜨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먹이를 유혹하는 미끼를 내보일 정도로 사냥의 즐거움을 아는 포식자라는 뜻이었다. 어느 것이든 제 수술대에 올리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그 욕망은 언제나처럼 명확했고, 키드는 로우의 환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바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대가로 원하는 걸 말해라, 트라팔가.”
“너는 여전히 성급하군.”
“이미 네놈이 내 시간을 충분히 낭비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변함없이 무례해.”
로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드의 손이 움직였다. 칼날은 정확히 로우의 목을 겨눈 채로 멈췄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페이퍼 나이프가 스스로의 목을 금방이라도 가를 것처럼 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우는 얼굴에서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였다.
이런 식의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대화는 그와 유스타스 키드 사이에서는 일종의 안부인사와도 같은 사소한 것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서 그를 파괴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하는 짐승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은 그나마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부자유만큼이나 인간의 삶을 질식시켜 죽이는 것은 무기력함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평화로운 이 바다에 가라앉아 죽고 싶지 않은 것은 마주한 붉은 눈의 흉포한 사내도,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로우는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 그의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 깍지를 꼈다. 나이프의 끝이 그의 목을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지만 로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긴 손가락의 관절 위에 새겨진 검은 알파벳들이 의미를 짓뭉개듯 서로 겹쳤다.
“사흘.”
“뭐?”
“내 성에 사흘간 머물러라, 유스타스야. 그럼 네가 원하는 걸 주지.”
키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능력 아래에 있는 로우의 페이퍼 나이프는 여전히 제 주인의 목에 날을 세운 채였다. 가는 핏줄기가 그의 목을 타고 흘러 창백한 피부 위를 지나 검은 셔츠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무슨 속셈이지? 키드의 질문에 로우가 대답 대신 돌려준 것은 키드의 새빨간 눈동자 바로 앞에서 멈춘 페이퍼 나이프였다. 맺혀 있던 빨간 핏방울이 뚝, 하고 떨어져 흉터가 남은 흰 얼굴 위에 궤적을 남겼다. 트라팔가 로우의 룸은 그가 사황이 된 후 단 한 순간도 닫혔던 적이 없다는 것을 키드는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의 시선은 제게 겨누어진 나이프 대신 여전히 로우를 향하고 있었다. 그를 찌른 나이프보다 더 날이 선 붉은 눈을 마주한 채로, 로우는 낮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네 말을 들으니, 시간낭비를 하고 싶어졌거든.
2.
과연, 예의도 없군. 그것이 처음으로 나누었던 대화였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감상을 교환한 첫 인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의 한껏 확장된 회색 동공, 그 둘레를 장식하는 금빛에는 둘 사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기색이 만연했다. 창백한 팔 위의 기하학적인 문양들은 오래된 기억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오래된? 키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로우는 그를 향한 건방진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다시 무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샤봉디 제도의 옥션은 그가 들렀던 여러 경매장 중에서도 그 취향이 고약한 것이었다. 천룡인도 제 무겁기 짝이 없는 몸을 움직여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그 소비계층이 귀족이나 재벌 축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피비린내와 욕설이 모조리 거세된, 먼지 한 톨도 없는 깨끗한 홀. 그 안에서 진동하는 짙은 향수냄새와 우아한 부채질 소리, 위선적인 속삭임들. 그리고 거래되는 것은 아름다운 살덩이와 재미있는 목숨들이었다. 중독적인 악취가 풍기는, 오만한 유희.
지금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은 두 눈에 에메랄드가 박힌 푸른 머리의 세이렌이었다. 같은 순간에 동시에 올라오는 수많은 손. 각자 제 금액을 제시하는, 두 개의 손가락이 엉키며 만드는 사인. 키드는 그 손목들을 모조리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먼 앞쪽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익숙한 인영만이 그 고요한 욕망의 현장에서 제 팔짱을 낀 채 홀로 고고한 체를 하고 있었다. 후드 위로 드러난 목덜미가 얼핏 보였다. 재갈이 물린 세이렌의 입술보다도 더 억눌린 유약함이었다. 키드는 그의 목에 채워진 노예의 목걸이를 무심코 떠올려 보았다. 경매 진행자의 한껏 고조된 목소리가 아프게 귀를 울렸다.
로우의 손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손이 다시 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올라왔다. 옥션을 위한 사인이 아니었다. 그는 손짓으로 키드를 부르고 있었다. 키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트라팔가 로우가 앉아 있는 줄까지 걸음을 옮겼다. 로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제 옆을 내 주었다. 바닷물 특유의 소금기가 만연한 비린내 사이로 옅은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곁에 앉은 후에야 키드는 로우의 주변에 제 선장에 기묘할 정도로 애착을 가진 그 보기 싫은 하트 해적단의 종자들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떤 사실에 생각이 미쳐 뒤를 돌아보자 그 곳에는 그와 동행해야만 했던 키드 해적단 크루의 모습이 없었다. 그에 대한 사고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진행자의 약에 취한 것처럼 흔들리는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탐욕입니다! 어떻습니까?
더 이상 경매는 사람을 팔고 있지 않았다. 키드는 그 꿈틀대는 탐욕이라는 물건에서 익숙함에 가까운 기시감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의 것이었던, 혹은 그의 것이어야만 하는 물건을 보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로우는 흥미를 드러내지 않는 무심한 눈으로 찬란한 금빛으로 늘어지는 유체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키드는 그제서야 그 탐욕스러운 황금을 어디서 보았는지를 기억할 수 있었다. 트라팔가 로우에게, 그리고 유스타스 키드에게 언젠가 동시에 속해 있었던 감정이었다. 그리고 유스타스 키드가 오늘-9년 전- 샤봉디의 옥션에서, 트라팔가 로우의 금빛 눈에서 발견했던 바로 그 열망의 형태였다. 물건은 금새 낙찰되었고, 녹은 금은 어떤 홍매빛 남자의 것이 되었다. 듣기 싫은 기묘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키드는 치기 어린 유년이라는 이름의 루비로 된 석류가 사라진 무대 위로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덴의 풍경이 출품되는 것을 보았다. 푸른 섬의 생기가 시야를 채웠다. 그의 손 아래에서 목이 잘린 얼굴이 하나쯤은 섞여 있을 것이었다. 로우는 키드 쪽으로 몸을 약간 기울였다. 진행자의 발 밑으로 깨진 무지개가 녹아 흐르고 있었다. 이제 곧 재미있는 게 나올 거야. 스물 넷의 트라팔가 로우에게는 말꼬리를 조금 치켜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잠이 덜 깬 것처럼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에 키드는 생각하는 대신 로우가 가리키는 무대 위로 눈을 돌렸다. 진행자의 거대한 입이 활짝 벌어졌다. 다음 품목은-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기다려오셨던 바로 그 물품-
“바로 사황 유스타스 ‘캡틴’ 키드의 잘린 팔입니다!”
무대 위로 올라온 두터운 팔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조명 아래서 사람의 살이라고는 부를 수 없을 정도의 새하얀 색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자리가 꽤나 앞이었던 탓에 그 긴 손가락들에 끼워진 화려한 금빛 반지의 장식과 끝이 갈라진 검은 네일 폴리쉬의 자국마저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하게 보였다. 확실히 그 자신의 팔이었다. 아니, 유스타스 키드의 팔이었던 무언가였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한 쪽 어깨 아래가 불에 타는 것처럼 욱신거려 키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서야 키드는 어느새 그의 한쪽 팔이 빈틈없이 기름칠이 된 강철의 오브제로 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물 하나의 그에게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끝이 닳은 금속의 혼합물. 로우는 여전히 키드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얇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갖고 싶나?”
로우는 키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손을 들었다. -네, 청년분이 1억 6천! 다른 분 없으십니- 오, 귀부인께서 1억 8천! 좋습니다- 원한다면 도로 붙여 줄 수 있어. 아니면, 방금 경매를 위해 움직였던 손이 다가와 키드의 기계팔 위를 짚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핏자국의 바로 위를 더듬는 가늘고 곧은 손의 끝. 더 좋은 걸로 바꿔줄 수도 있지. 인심을 쓰는 것처럼 말하는 로우의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금색 눈동자는 그 안에 서린 진득한 퇴폐감 탓에 제 나이보다 훨씬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키드는 주저하지 않고 살아있는 그의 손으로 로우의 목을 잡았다.
미친 것처럼 올라가던 금액은 스물 한 살이던 유스타스 캡틴 키드의 현상금을 뛰어넘은 후에야 멈췄다. 낙찰자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지만 키드도, 로우도 그 쪽에는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다. 전혀 빨라지지 않는 상대의 호흡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온다. 떨리지 않는 심장의 고동, 한 쪽 입꼬리가 좀 더 높게 올라가는 미소. 키드의 달아오른 새빨간 눈동자와 로우의 위험하게 빛나는 금빛 눈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소리없이 부딪혔다. 부서질 것처럼 힘을 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우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유감이군. 항상 아쉬웠는데 말이지.
3.
유스타스 키드가 눈을 떴을 때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키드는 체온이 있는 쪽의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익숙한 흉터가 손 끝에 닿는 감각과 함께 온 몸을 강렬하게 짓누르던 지독한 환지통은 점차 누그러졌지만, 그의 손 아래에서 멈추던 목숨의 느낌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몰려든 현실감이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 둔 탓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미소가 머릿속에 타르처럼 늘러붙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여전히 달라붙는 불쾌감을 무시하며 키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날 밤 잠들었던 시간이 그의 평상시보다 일렀던 탓에 더 이상 누워 있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술도, 여자도, 시체도 없는 빈 침대가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유스타스 키드 역시 이 바다의 오래된 해적들이 그렇듯 편안한 잠을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흐트러진 시트를 제외한다면 사람 냄새도 나지 않을 것처럼 단정하기 그지없는 방은 손님용이라기엔 지나치게 거대했다. 누구나 갖게 되는 지독한 불면증이지.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트라팔가 로우가 지나가는 것처럼 그런 말을 건넸던 것이 벌써 오래 전의 겨울이었다. 아직 어두운 복도로 나서며 키드는 이 별장의 주인이 마지막으로 깊게 잠들었던 게 언제였을지를 생각했지만, 알 수 없었다.
긴 복도는 밝혀 줄 빛이 없었던 탓에 어슴푸레했고, 그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냉기가 서린 대리석의 바닥은 키드의 발자국 소리를 걸음마다 최소한 두 번쯤은 공명시키고 있었다. 키드의 예민한 청각은 그의 발소리 끝에 섞여드는 어떤 숨소리들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복도 벽에 걸린 키메라의 박제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살아있는 채인 동물의 일부에게 박제는 그닥 적당치 않은 표현이겠지만 딱히 그 이외의 어휘는 떠오르지 않는다. 거대한 늑대의 잘린 목, 어두운 색의 붉은 모피가 더운 김을 뿜고 있었다. 한쪽 눈가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아하니 사냥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짐승인 모양이었다. 멀쩡한 한쪽 눈이 제멋대로 돌다가 키드를 마주한다. 벌어지는 거대한 입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들이 매서웠다.
겨울의 설원에서 포식자의 새빨간 몸은 얼마든지 눈에 띄었을 것이다.
키드는 그 사실에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로우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키드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각오조차 없었던 과거의 맹수에게 짜증 섞인 유감을 느꼈다. 강한 짐승은 고고하게 죽어야 했다.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택할 수 없는 약한 생물의 삶이라는 것은 그 끝이 언제나 비참하기 마련이었으므로.
키드는 여전히 거친 숨을 뿜는 동물의 토막에서 관심을 돌려 다시 복도를 가로질렀다. 딱히 목표로 한 곳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트라팔가 로우가 그에게 요구한 이곳에서의 시간 동안 그는 그의 무료함을 달랠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키드는 어제 방을 향해 걸어오던 길이나 로우의 서재가 있는 방향을 되짚어보았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무리 걸어도 똑같아 보이는 복도와 계단의 연속이었을 뿐이었고, 결국 언제나 그러했듯 그의 감이 이끄는 곳으로 움직였다.
트라팔가 로우가 무슨 꿍꿍이로 그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고 싶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몇 겹이고 제 계획을 거미줄처럼 짜 두는 젊은 사황은 이제 기가 막힐 만큼 노련해져 예전 초신성이라는 칭호를 달고 다니던 때의 빈틈은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은 그들에게 경험이라는 강대함을 주었다. 유스타스 키드의 능력이 능력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공격수단들을 모조리 봉쇄할 수 있다고 한다면, 트라팔가 로우의 능력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농락하는 수단이었다. 몸도, 정신도.
제 목이 나이프에 찔리도록 둔 채로 미소를 짓던 얼굴. 꿈 속에서 보았던, 아직 제 열망을 숨기는 법조차 모르던 루키의 웃음. 같은-전혀 다른-두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키드는 그 교차에서 느꼈던 찰나의 어떤 어색함을 붙잡으려 애썼다. 무언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머리에 안개가 낀 듯한 나직한 두통이 찾아왔다. 조금 먼 곳에 인기척이 있었다. 키드는 고개를 들었다.
곧 아침식사가 준비됩니다. 식당으로 모실까요? 마른 저음은 분명히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긴 흑발이 인상적인 여성 메이드였다. 깊게 눌러쓴 모자가 메이드복에 어울리지 않게 영 어색했다. 어둠 속에서도 석고처럼 새하얀 두 다리가 벽에 걸린 생물들보다도 무기질적으로 보였다. 로우의 능력은 이미 어떤 형태로든 키드의 상상력의 범주 이상이었고, 그렇기에 키드는 그 메이드의 존재에 대해 별로 의문을 갖지 않았다. 키드는 그-혹은 그녀-의 말을 무시할까 했지만 그가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내 상기했다.
“주인님께서는 오늘 외출하실 예정으로, 성 안의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었다. 유스타스 키드는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팔가 로우는 그런 전언을 새겨 놓았을 것이다. 키드는 여기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눈살을 찌푸려준 후 입을 열었다. 식사는 필요없어. 방으로 가지. 차가운 복도의 공기가 아직 립스틱을 덧씌우지 않은 입술을 쓰릿하게 했다. 키드는 생각난 듯 덧붙였다. 그리고 너를 써야겠군. 메이드는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길을 안내했다.
키드는 로우의 별장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가 이 메마른 섬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기껏해야 오늘 외출했다는 그 남자 본인뿐이었으므로. 앞서 움직이는 메이드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는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았다. 침대를 데워줄 것을 찾았으니 적어도 몇 시간은 무료하지 않을 터였다. 꿈 때문에 설친 잠을 다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이 또다시 부유하기 시작할 기미에, 키드는 약속이 끝나는 날의 아침이 끔찍하게 먼 미래의 일 같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4.
두 번째 꿈에서 유스타스 키드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신만은 서른의 그것이었기에, 키드는 그가 꿈을 꾸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상을 바라보는 인간은 현실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지할 수 있어야 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이제 유스타스 키드는 제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인내심과 평정심이라는 가면을 쓰는 법을 알고 있었다. 사황의 이름은 힘만으로는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직후의 일이었다.
키드는 천천히 그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의 잘린-잘리게 될-손에는 낡은 스패너가 잡혀 있었다. 검은 자국과 자잘한 생채기들이 새겨진 손은 그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영혼에 족쇄를 채운 악마도 느껴지지 않았다. 열매를 먹기 전의 나이였던 것이다. 익숙해진 것은 없어진 순간에 더 그 존재감이 뚜렷하기 마련이었다. 무력하다는 기분이 몸을 엄습했고, 그것은 키드를 상당히 불쾌하게 했다. 키드는 그의 손에 잡힌 현재의 유일한 무기를 움켜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넓은 백사장이었다. 발가락 사이로 밀려드는 모래 알갱이가 작고 가늘었다. 바로 맞닿아 있는 드넓은 바다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칼로 단숨에 잘라낸 것처럼 곧은 수평선. 뒤를 돌아보자 역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모래 너머의 지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희미한 바람 한 점도 없이 고요한 탓인지 새파란 바닷물 위의 파도가 거의 없는 것마냥 잔잔했지만 키드는 이내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파도는 해안으로 밀려오고 있지 않은 채로 바로 그 자리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마치 캄 벨트의 바닷물처럼.
그리고 그의 옆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는 부드러워 보이는 흰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였다. 어느 한 군데도 흐트러진 데가 없는 단정한 모습이 어린 키드 자신의 남루한 옷차림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아이의 모습에서 유일하게 비뚤어진 것은 색이 옅은 창백하고 작은 입술뿐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인상이 익숙했다.
“그런 건 내려두지 그래, 유스타스야.”
그 말이 나온 순간 키드는 아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손에 메스를 들고 있는 꼬마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상념을 굳이 말로 내뱉을 정도의 사이도 아니었다. 어차피 저 쪽도 키드가 그의 손에 잡힌 공구를 순순히 버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트라팔가 로우의 유년은 그닥 영양을 풍족하게 섭취하지 못하던 이 시절의 키드보다도 더 작고 가냘펐다. 혹은 그의 이 모습은 키드보다 실제로 어렸던 때의 생김새인지도 모른다. 키드는 문신이 새겨져 있지 않은 그의 맨손이 이채롭다고 잠시 생각했다.
로우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 키드에게 금새 흥미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은 이제 키드의 등 뒤로 펼쳐진 드넓은 바다에 향해 있었다. 그 쪽으로 돌아간 매끈하고 작은 턱과 선이 도드라지는 가느다란 목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도 창백하게 어두운 색. 그 나이의 아이가 가져서는 안될 것처럼 짙게 가라앉은 눈가가 어떤 침입에도 무너질 것 같은 아이 특유의 연약함과 맞물려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키드의 손에 들린 작고 낡은 스패너로도 죽일 수 있을 것처럼 약해 보이는 목숨이었다. 그것은 유스타스 키드가 알고 있는 트라팔가 로우가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는 키드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로우의 금빛 눈동자가 다시 키드 쪽을 향해왔다. 이번에는 확실히 키드가 알고 있는 시선이었다. 그들 사이의 도발과 오만, 증오와 욕망으로 가득 찬 역사의 교차점마다 몇 번이고 마주했던 눈. 날이 선 발톱을 깊게 숨긴 포식자의 기색. 가장 강한 사냥감을 산 채로 잡아 길들이고 싶어하는 괴물의 식지 않는 탐욕. 오로지 동족만이 이해할 수 있는 열망으로 가득한.
시선을 마주한 채로, 트라팔가 로우는 유스타스 키드에게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바다에 들어갔던 게 언제였지?”
그의 말은 분명히 키드를 향한 것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기 자신을 향한 자문처럼 들리는 모호한 어조를 띠고 있었다. 로우는 키드의 핏빛 금속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다가 날을 세우듯 가늘어지는 모양새를 제 눈에 담으며 키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바다.
악마의 열매를 먹고 헤엄칠 수 없는 몸이 된 후로 바닷물에 몸을 담근 것은 기억에도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하다못해 손가락 하나라도 스스로 바다에 집어넣었던 적이 있었는가를 되짚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로우가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아이러니지. 해적이 바다에 들어갈 수 없다니. 그 사실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이라는 듯한 어투였다. 키드는 그것이 전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린 모습은 잊고 있었던, 혹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열매를 먹은 날, 그 자신이 더 이상 보통의 인간이 아니게 되었던 그 순간. 사후를 악마에게 저당잡히고 영혼의 발목에 끝이 보이지 않는 닻을 채우게 되었던 바로 그 날의 기억. 무엇도 변하지 않은 여느 때처럼 온 몸을 푸르고 서늘한 물 안에 던져넣었던 순간 깨달았던 감각.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심해에서부터 그의 사지를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들이는, 그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것. 영겁처럼 느껴지던 깊은 바닷속으로의 느린 추락. 그와 함께 발끝부터 천천히 온 몸을 기어올라오며 그를 잠식하던,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아무리 강대한 능력자들에게도 익사의 공포는 거의 낙인처럼 그 몸과 정신에 새겨지는 것이다. 마치 무슨 짓을 해도 눈앞의 맹수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피식자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었다.
두려움. 키드는 그런 개념을 자신이 떠올렸다는 사실 자체에 불쾌함을 느꼈다. 키드가 꼬인 매듭처럼 엉킨 채로 풀리지 않는 상념에 묶여 있는 동안 로우는 바닷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키드는 고개를 들어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로우-의 어린 모습-에게 시선을 향했다. 파도가 밀려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물에 젖는 게 염려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로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 구두를 벗어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다. 찰박대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작은 맨발이 얕은 소금물 안으로 잠겨들었다. 바다는 제 안으로 들어온 무엇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무릎 위까지 차오른 검푸른 수면이 나지막히 흔들리며 연한 색의 반바지에 짙은 물자국을 점점이 새긴다. 얼마 후 그 손등 위에 검은 문양을 새기게 될 창백한 손의 끝이 수면에 잠시 닿았다가 이내 키드 쪽을 향했다. 그에게 내밀어진 손. 로우는 입을 열었다.
“너도 들어오지 않겠어?”
키드는 스스로의 머리가 미쳐버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기꺼이 로우의 말에 따랐다. 어차피 꿈이라면 못 어울려 줄 것도 없었다. 햇빛에 따스해진 모래에 묻혀 있느라 달아올라 있었던 그의 발 위쪽으로 차가운 물이 휘감겨왔다. 바닥을 적시고, 뒤꿈치를 따라 아킬레스건 위를 타고 기어오르듯 서늘하게 잠식되는 감각이 생경했다. 키드는 물의 안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무릎 위, 허벅지까지 올라올 정도의 깊이까지 도달하자 키드는 그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느낌들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 시간동안의 망각에 짓눌려 있던 탓에 아직은 어색한.
로우는 키드를 이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물 안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나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자켓의 한참 위까지 바닷물이 스며들어 그 경계로 색이 확연하게 다른 게 눈에 띄었다. 원래의 모습이었다면 기껏해야 무릎 한참 위로나 닿았을 만한 깊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작은 몸은 조금 깊은 곳에서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로우는 마치 처음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순전한 흥미로 가득찬 눈을 한 채로 저를 잡아먹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을 헛디뎠는지 아이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키드는 아무 생각 없이 팔을 뻗어 넘어지려는 로우의 몸을 잡았다. 그 바람에 손에서 놓친 스패너가 물 아래로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방금까지 메말라 있던 그의 옷자락 끝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로우는 히죽 웃고는 제 팔을 붙잡은 키드의 손목을 붙잡아 세게 당겼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몸이 푸른 물 안으로 잠긴다.
본능적인 공포가 찾아들었다. 비강으로 파고들어온 소금기가 새기는 날카로운 통증. 시야에 점멸하는 굴절된 수면의 빛. 한참을 허우적대던 키드는 지금의 그는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몸의 중심을 잡고 팔을 헤쳐 수면 위로 머리를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끊겼던 호흡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키드는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이마 위로 내려와 눈을 찌르는 새빨간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물은 겨우 어깨 아래까지 닿는 깊이였다. 아무도 죽지 않을 얕은 수위였다. 동시에 그것은 한 번의 파도로도 수많은 목숨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만족을 모르는 짐승의 발톱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괴물은 그들이 욕망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었다. 키드는 바다를 보고 있던 어린 로우의 시선을 이해했다. 로우 역시 키드의 상실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너무나도 많은 공통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자신은 영원히 닿지 못할 평행선과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키드는 분노했다. 분노의 대상을 규명하는 것은 쉬웠다. 검은 머리의 아이는 여전히 그의 손이 닿는 거리에서 나이에 맞지 않는 어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키드는 그 작은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대신 로우의 팔을 잡아당겨 그를 물에 빠뜨렸다. 그 앙증맞은 털모자를 뒤집어쓴 채로 허우적대는 꼴은 꽤나 볼만했기 때문에 키드는 기분이 조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물 밖으로 튀어나온 얼굴이 몇 번 숨을 몰아쉬다 균형을 잡았다. 흰 모자는 어디로 떠내려가버린 모양인지, 물에 젖어 축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앳된 얼굴이 평소의 창백한 색을 잃고 약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키드는 그의 꿈-무의식-환상-이 만들어냈다고 생각되는 어린 로우의 모습을 보며, 실제의 그 건방진 남자가 어떤 유년을 보냈을지를 상상해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사실은 이보다 더 재수없는 느낌의 영악한 꼬마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 연약해 보이는 어린 외관마저도 기꺼이 장기말로 쓸 줄 아는. 혹은 좀 더 천진한 맛이 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키드는 눈앞의 아이 대신 그의 것이 아닌 남자의 모습을 생각했다. 의식의 경계에 얼룩처럼 남은 몇 개의 기억들. 지금 당장 지워 버린대도 그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잘린 팔-바다-유년-과는 달리, 소유한 적이 없었던 것에는 상실감을 느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팔가 로우는 키드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꿈은, 키드는 스스로의 무의식에 순간적으로 지독한 염증을 느꼈다.
마약처럼 내려앉는 꿈이었다. 키드는 눈을 감았다 떴다. 눈가에 맺혀 있던 소금기가 밀려 떨어진다. 정신의 끄트머리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키드 스스로를 좀먹는 감각은 언제나 그를 위선으로부터 구제해 주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물에 반쯤 잠긴 채로, 유스타스 키드의 로우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를 알 것 같군.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는 식의 말투는 키드의 신경을 건드렸고, 키드는 언제나 그래왔듯 트라팔가 로우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것이 설령 키드의 무의식 일부가 구체화된, 그가 가장 원하는 말을 하고 있는 이상이라고 해도.
거침없이 물을 헤치고 나아간 키드는 로우의 팔을 붙잡고 그를 바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로우는 저항 없이 키드를 따라 움직였다. 그의 작은 손은 어린 아이의 가느다란 팔조차 한 손에 잡지 못했지만, 이제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에는 그가 신경쓸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물이 점점 깊어진다. 키드는 수평선을 향해 두려움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키드에게 잡힌 채 뒷걸음질로 바다 안쪽으로 끌려들어가는 로우의 금빛 눈동자에 멀어지는 해안이 환영처럼 잠시 비췄다가 이지러졌다.
어느새 물은 턱까지 차오르는 깊이가 되어 있었다. 유스타스. 아이가 키드의 이름을 불렀다. 키드는 그들이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바닥이 발에 닿지 않는, 갑자기 바다가 깊어지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물결은 침묵처럼 고요했다. 영원히 파도가 오지 않을 것처럼. 이 꿈 속에서는 달이 뜨지 않는 모양이었다.
키드는 물을 헤치던 빈 손을 뻗어 로우의 목을 움켜잡았다. 한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아 결국 다른 손마저 뻗는다. 양 손에 잡힌 작은 목숨.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둔한 현기증과 함께 기시감이 찾아왔다. 로우는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물에 젖은 검은 속눈썹이 내리깔린 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익숙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였다. 키드는 그보다 작은 아이의 몸을 그대로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히고, 손에서 맥박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5.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눈을 찌를 듯이 밝은 햇빛이었다. 두터운 커튼이 걷힌 거대한 창에서 구름 한 점 없는 겨울 하늘의 햇살이 온 방 안을 빈틈없이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해의 높이로 보아 적어도 정오는 된 모양이었다. 시간감각이 한참이나 흐려져 있었다. 물기가 부족한 것처럼 눈가가 시큰하게 당겨 키드는 손등으로 그의 눈가를 강하게 문질렀다. 잠들기 전 지우지 않은 검은 잉크가 흰 손등에 불규칙한 궤적을 남겼다. 그 모양새가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키드는 넌더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고, 환히 밝혀진 방 안에서 그의 저기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트라팔가 로우가 키드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누워 있는 침대의 맞은편에 놓인 거대한 의자에 몸을 묻은 채였다. 길게 뻗은 두 다리의 아래, 끝이 날카로운 검은 구두의 끝이 키드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침대 끝에 얹혀 있었다. 키드는 그가 머무는 이 손님방의 구조에 관심을 그닥 기울인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로우가 앉아 있는 저 붉은 안락의자가 이 방에 원래 없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깊게 눌러쓴 새하얀 모자 탓에 보이지 않는 눈이 어떤 기색을 띠고 있을지는 그 비뚤어진 입매가 짓는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로우는 제 자신도 마치 방금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키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검게 그늘진 눈가는 키드 자신의 번진 아이라인보다도 더 아래까지 짙게 쳐져 있을 것처럼 보였다. 짧은 침묵을 깬 것은 로우의 쪽이었다.
“잠자리가 편치 않았던 모양이군. 악몽에라도 시달렸나?”
“…아니, 실현되었으면 좋았을 뻔한 꿈이었지.”
네놈이 그렇게 건방지게 자라기 전에 죽여버렸으니까. 키드의 뒷말은 그의 머리 안에서만 맴돌았다. 사실은 그의 대답도 잠꼬대처럼 생각 없이 튀어나온 것에 가까웠다. 그거 다행이군. 로우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방에서 나가기는커녕 그 자세에서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로우를 무시하기로 결정한 키드는 몸을 일으켜 침대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그의 옷가지들을 주워 대충 걸쳐입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흉터 투성이의 새하얀 몸은 몇 번이고 계속된 전투에서 살아남은 승자의 상징이었다. 자는 동안 떼어 두었던 거대한 의수는 키드가 손짓하자 저절로 날아와 그의 어깨 아래에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달라붙었다. 키드는 제 등뒤로 꽂히는 로우의 시선을 느꼈다. 칼끝으로 그의 어깨를 후벼파는 듯한 짧은 통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얼굴 한쪽을 뒤덮는 흔적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흉터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어느 순간엔가 트라팔가 로우가 제 손끝으로 길게 훑었던 적이 있는 궤적이 덧대어진 곳이기도 했다.
부츠는 어째서인지 침대에서 한참 먼 곳까지 날아간 채였다. 짧게 잇소리를 낸 키드는 방을 가로질러 그의 신발 쪽으로 다가갔다. 신발에 금속 징이라도 박아 두라던 킬러의 조언은 이번에도 틀린 것이 없었다. 로우는 깍지를 낀 두 손을 편히 올려둔 채로 무엇도 흥미로울 게 없다는 것처럼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기장이 긴 검은 자켓 안쪽으로 마른 상체가 드러나 있었다. 발에 그의 부츠를 기계적인 동작으로 꿰어 신으며 키드는 트라팔가 로우의 몸에 새겨진 검은 문신들을 보았다. 검은 선이 그리는 하트와 스마일. 손가락에 새겨진 죽음. 제대로 신기도록 뒷굽을 바닥에 짓누른 키드는 아직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짧은 기지개를 켠 후 로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치 목이 졸린 것처럼 쇳소리가 섞인 스스로의 목소리조차도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지?”
“해가 중천인데도 일어나지 않길래. 손님을 챙기는 건 주인의 일이니까.”
혹시 죽기라도 했을까봐 걱정했다고. 그렇게 덧붙이며 메마르게 엉겨붙는 미소는 정오의 햇빛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종류였다. 확인했으면 꺼져. 키드의 날이 서린 거친 어조에도 불구하고 로우의 자세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언제나 그들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겉돌고 있었다. 로우는 무언가 용건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키드를 관찰하기 위해 온 것처럼 보였고, 그것은 키드를 불쾌하게 했다. 키드의 짧은 손짓을 따라 그의 바지춤에 꽂혀 있던 단도 하나가 로우 쪽을 향해 날아갔지만, 그 나이프는 다음 순간 키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꽂혔다. 이틀 전에 확인했듯 섬 전체는 로우의 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저 확인하는 것에도 지나지 않는, 단지 짜증을 풀기 위한 충동이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창 밖을 보던 로우의 시선이 다시 키드를 향해왔다.
“사냥이라도 가지 않겠어?”
오늘은 날이 맑군. 로우의 어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성 안에서 보낸 키드의 어제는 끔찍할 정도로 무료했고, 그렇기에 키드는 로우의 제안을 승낙했다. 물론 키드가 사냥하고 싶은 것은 섬 안의 맹수가 아니라 그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였지만.
6.
트라팔가 로우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별장의 벽에 걸 새로운 장식이었다. 사냥이라는 명목에는 적절했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사실 어울리지도 않는 핑계였다. 그저 아무것도 변하게 할 수 없는 무료한 일상에서 시간을 죽이기 위한 가벼운 심심풀이. 모든 것에 쉽게 싫증을 내는 아이가 제 장난감 상자 안을 헤집어 그 날 가지고 놀 인형을 골라내는 것처럼.
영원한 겨울의 섬에서 항상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포악해진 맹수들은 그들 앞에 나타난 두 인영을 제 뱃속에 집어넣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세우고 달려들어왔다. 키드는 로우의 목적을 완전히 방해하려는 게 유일한 목표인 사람처럼 만나는 모든 맹수를 처참하게 난도질해 죽여버리고 있었다. 흰 설원 이곳저곳이 깊게 물어뜯긴 것처럼 패이며 붉게 물드는 광경은 사냥이라기보다는 살육에 가까웠다. 얼어붙은 땅이 갈라진 틈으로 오랫동안 드러난 적이 없었을 먹빛의 흙덩이들이 충격과 함께 높게 튀었다. 검붉은 상흔들이 흰 캔버스 위에 떨어진 얼룩처럼 엉망으로 퍼졌다.
로우는 그의 섬을 키드가 상처입히는 걸 보면서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키드의 모든 행동들이 그를 위한 공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짱을 낀 채 키드가 제 몸과 섬을 동시에 피투성이로 만드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새하얀 것 위에 끈적한 얼룩들이 새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가해자와 피해의 대상이라는 관계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트라팔가 로우의 능력이 인간의 상상이 현실로 구체화되는 형태로 단 하나의 우연조차 없이 재조립하고 재조합하는 데에 있다면, 유스타스 키드의 살육은 생물의 가장 근본적인 공포를 건드리는 강력한 폭력이었다. 찢고, 부수고, 조각내는 그 모습에는 질서가 없는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교묘한 미학이 있었다. 녹아내린 얼음처럼 예전의 형태로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완전한 파괴. 로우는 언제나 산 채로 조종하고, 아주 작은 것 하나마저 온전히 그의 것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키드가 실현하는 정벌과 지배는 그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시에 키드 역시 로우의 정복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키드의 공격에 팔 하나가 날아간 채로도 목숨이 떨어지지 않은 거대한 짐승 하나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다 그 난장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 있던 로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로우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한 손에 쥐고 있던 귀곡을 발도했고, 상처입은 맹수의 몸은 정확하게 수직으로 절반으로 잘린 채 바닥으로 추락했다. 푹신하게 쌓인 눈이 제게 안겨오는 시체를 반기듯 둔한 굉음을 내며 떨리는 것이 발 밑으로 전해져왔다. 둘로 잘린, 이제는 생물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거대한 흔적을 사이에 둔 채로 로우는 그 너머에 있는 키드에게 시선을 향했다. 둘 사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불에 달아오른 금속처럼 붉은 눈이 머금은 피비린내가 이곳까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로우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침실 벽에 걸어두고 싶었던 맹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의 소유욕을 자극했던 생물. 그 기반은 채워지지 않는 탐욕과 닿지 않는 것에 대한 열망에 있었다. 시간은 그들이 가진 것들로부터 치기와 무모함을 잠재운 후 그 위에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오만과 숨막혀 죽을 것 같은 지루함을 새겨 놓았다. 그렇기에 그 형태의 발로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스타스 키드와 그의 사이에는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일방적인 유대가 존재했다.
먼저 걸음을 옮겨 로우와의 거리를 좁혀온 것은 키드의 쪽이었다. 둘의 거리는 이제 서로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로우는 이제는 명백하게 짙어진 금속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쇠와 피의 냄새였다. 로우의 귀곡은 어느새 다시 검집 안으로 돌아간 채였다. 로우의 비어 있는 손이 다가와 키드의 얼굴에 튄 피를 손끝으로 훑었다. 붉은 머리카락, 검붉은 립스틱,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동자와 그 몸의 일부를 과도하게 잠식한 금속의 어셈블리지. 그 모든 것이 스스로의 생을 증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과 맞물린 채, 소용돌이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지독한 갈망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끝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핏덩이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키드의 기계팔이 로우의 팔을 움켜쥐었다. 쇠붙이로 된 거대한 금속의 조합들 사이에서 로우의 마른 팔은 마치 거대한 덫에 걸린 창백한 모피의 동물처럼 보였다. 유스타스 키드에게 있어 제게 닿아온, 그의 손 안에 잡힌 생물은 그의 가장 근본적인 갈증이 원색적으로 구체화된 형태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치 깨진 거울에 비친 허상처럼 그가 아닌 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가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키드의 것이 되지 않는 어떤 것을 보는 것처럼. 한 단어로 규명되지 않는, 그렇다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인. 분노하기는 쉬웠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모든 것, 바라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어떤 준비도 없이 가장 먼저 터뜨릴 수 있는 감정이었으므로.
키드는 로우의 손목을 부서뜨릴 것처럼 움켜쥐었다. 원래도 핏기가 없는 손이 밀랍처럼 생기 없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좁아진 혈관 사이로 흐르지 않는 흐름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키드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빼내는 대신, 로우는 키드에게 질문했다.
“나를 죽이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유스타스 키드.
로우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키드의 다른 손이 로우의 목을 붙잡았다. 키드를 바라보는 로우는 바닷속에 가라앉던 아이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7.
모든 것은 권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바다가 새로운 해적왕을 맞이했던 그 날, 트라팔가 로우의 모든 것은 그가 제어할 수 없는 형태로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 무엇도 그에게는 특별하지 않았던 어떤 날, 그가 가장 원했던 무언가, 그가 무엇보다 열망했던 어떤 것이 다른 누군가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믿고 싶지 않았던 그의 상실은 트라팔가 로우가 밀짚모자를 쓴 그 어린 해적을 마주한 때에 결국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로우는 루피의 검은 눈 안에서, 그가 도달하지 못한 경계 너머의 무언가를 보았던 것이다. 그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격을 갖춘 남자에게 속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트라팔가 로우는 그의 생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심장을 제 몸 밖으로 잘라 두었던 때 느꼈던 결핍보다도 더욱 공허한 것이었다.
분노, 좌절, 공허, 상실. 그 무엇도 트라팔가 로우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는 수긍할 수 없었고 그가 가장 원했던 무언가를 놓치고 말았다는 것을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꿈, 이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그의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그만의 것이었던 순전한 갈망이 사그라드는 순간은 죽음보다도 더욱 끔찍한 고통이었다. 로우는 루피를 만난 이후 한참이나 그 상실을 부인하려 애썼다. 잠이 들면 그가 이해할 수 없던 검은 눈동자가 계속 떠올랐다. 단 한번도 스스로에게 써본 적 없었던 붉은 각성제로, 로우는 그 눈을 스스로의 수면과 함께 매일 밤 살해했다.
그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크루들이 바싹 말라가는 그들의 선장을 억지로 잠재우려 술에 약을 탔던 날, 그의 부선장의 목에 귀곡을 들이댔던 날 로우는 결국 그의 상실을 인정했다. 마른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를 이해하는 그의 부하-동료-들은 그에게 몽키.D.루피의 목을 베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로우의 좌절은 그 열망이 식어버렸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스스로가 인정하자마자 지독한 권태가 찾아왔다. 트라팔가 로우는 그의 삶이, 그가 자각하는 그 자신이 그렇게나 무력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상상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로우는 그날 밤, 그의 잠을 죽이기 위해 더 이상 약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들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는 긴 수평선이 있다. 정적과 고요, 그리고 유동적인 혼란이 산재한, 선이라고 하기에는 그 영역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어떤 구역. 의식의 언저리 혹은 무의식의 테두리에서 자신이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은 조각나고 산산히 부서져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수평선 끝에 물을 부어도 여전히 메말라 있는, 사막 같은 공허가 소리없이 유동하고 있음을 아는 것은 그 자신뿐이었다. 손을 대는 순간 타 버릴 것처럼 뜨거운 그것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자기억제에 고마워하지 않았지만, 트라팔가 로우는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의식 밖으로 그 암울한 욕구가 새어나올 것 같을 때마다 기꺼이 그 자신의 정신의 날을 다시 벼릴 수단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살아야만 했다. 무력함이 그를 파괴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사황이라는 이름도, 그의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질서정연한 계획의 실현도 바닥이 없는 그릇에 물을 채우는 것처럼 허무하게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로우는 예전의 열망을 되찾으려 애썼다. 적어도 그를 제외한 모두는 그 사실을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해군은 점점 강대해지는 사황을 경계했고 대중은 죽음의 외과의라는 호칭이 짊어진 악명을 두려워했으며 그의 크루는 로우가 지시하는 모든 것을 열성적으로 따르며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마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로우는 스스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권태는 헤엄쳐 빠져나올 수 없는 심해처럼 그를 질식시켜 죽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스타스 키드가 아덴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해져왔다. 그의 소유물-트라팔가 로우의 섬, 트라팔가 로우의 크루-이 파괴당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분노와 함께 로우가 느낀 것은 마치 끊어져 있던 퓨즈를 엉망으로 다시 이었을 때 튀기는 스파크와 같은 강렬한 충격이었다. 사황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고 바다의 많은 부분을 제 손에 넣은 유스타스 키드가, 이 평화로운 바다의 암묵적인 협정을 깨고 아덴 섬을 공격한 이유는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비어 있던 왕좌가 제 주인을 찾은 후에도, 키드는 여전히 그의 불길을 지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로우는 그의 안에서 갑작스럽게 끓어오른 무언가를 짓누르기 위해 느릿하게 호흡했다.
그는 트라팔가 로우가 상실했다고 생각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우는, 정말로 유스타스 키드라는 남자가 그 어리석을 정도의 오만과 탐욕을 부서지지 않은 채로 끌어안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긴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충동이었다. 로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키드의 배를 침몰시키는 것은 숨쉬는 것보다도 간단한 일이었다. 로우의 능력은 이미 이 바다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을 정도로 강대해져 있었다. 어떤 강한 능력자라도 결국 근원은 인간이었다. 사람의 생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는 서른 셋의 지금까지도 의사라는 호칭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수술실 안의 모든 것은 그의 것이었다. 심해에서 떠오를 수 없는 몸이 된 후로, 로우는 단 한번도 그 사실만은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토막난 고깃덩이들 위에 선 채로 불길이 피어오르는 그의 아덴을 바라보며, 로우는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키드는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 날아오는 거대한 쇠붙이들을 잘라내며, 로우는 그의 푸른 룸 안에서, 그리고 그의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바다 위에서 키드와 조우했다.
그와 키드의 싸움은 격렬했다. 금속이 맞부딪히고, 발을 디뎠던 모든 곳이 부서지고, 휩쓸린 수많은 것들이 부서져가는 흐름 안에서 로우는 마주한 남자가 분명하게 제 열망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랫동안 그가 거부해왔던, 트라팔가 로우를 향한 유스타스 키드의 무언가가 여전히 한 단어로는 정의되지 않는 온갖 감정-증오, 정복, 파괴욕,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는 강한 의지, 그리고-을 내재한 채로 향해오고 있다는 것도. 그의 안쪽이 사막처럼 부서진 날 이후 처음으로, 로우는 강렬한 소유욕을 느꼈다. 메마른 갈증이 다시 한번 목 안쪽으로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로우가 귀곡을 놓친 순간 키드는 손을 뻗어 로우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키드가 제 손에 힘을 주기도 전에 로우의 손끝은 이미 키드의 명치를 겨눈 채였다. 상대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도록 서로의 몸이 닿은 거리에서 그들은 잠시, 그러나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 동안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키드의 몸에서 풍기는 그의 부하들의 피비린내를 느끼며 로우는 키드의 모든 것을 자신의 안에 채워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덴에서 돌아온 로우는 피투성이가 된 몸을 치료할 틈도 없이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오랜만에 긴 꿈을 꾸었다. 그가 몇 번이고 억지로 살해해야만 했던 공허한 심연에 대한 것이 아닌, 붉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살아있는 머리를 그의 선장실에 장식하는 꿈이었다.
유스타스 키드가 거래를 제안해온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후의 일이었다.
로우는 키드가 원하는 것을 주는 대신, 키드로부터 그가 원하는 것을 받기로 했다.
8.
키드는 눈을 떴을 때 그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익숙한 기시감과 머리 안쪽을 짓뭉개는 듯한 둔한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허공에 선 채로, 머리 위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거세게 물결치고, 발 밑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면 그들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게 가장 먼저일 터였다. 키드는 머리를 뒤로 젖혀 검푸른 대양을 가로지르는 해류가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흐름이었다. 언젠가 그가 한 번쯤은 탔던 해류인 모양이었다. 그의 머리 바로 위에는 거대한 섬이 있었다. 아덴도, 샤봉디도, 키드가 현재 머물고 있는 로우의 겨울섬도 아니었다. 고개를 다시 숙인 키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발 밑의 태양이 눈부셨다.
뒤집힌 세계는 하늘을 향해 천천히 바스라져 떨어지고 있었다.
트라팔가 로우는 키드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이 날카로운 긴 몸은 보이지 않는 벽에 기대진 것처럼 편한 자세로 기울어진 채였다. 로우는 제 발밑을 물들이는 강렬한 태양빛을 눈이 전혀 아프지 않은 것처럼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의 곧은 턱선을 지난 빛줄기 하나가 그의 귀에 매달린 금빛 피어스에 느릿하게 스며들었다.
로우를 보던 키드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로우는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냥을 위해 설원에 나갔던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추위를 막기 위한,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코트는 이제는 희미해진 어떤 기억을 자극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른 세 살의 트라팔가 로우는 이제 스물 여섯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제 몸에 두르고 있었다. 키드는 아주 새삼스럽게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가 얼마나 무섭게 강해졌는가를 상기했다. 루키, 초신성, 칠무해, 그리고 사황. 그 모든 칭호를 이름 앞에 새기고 제 힘이 강대해진 만큼 바다의 많은 부분을 손에 넣은 죽음의 외과의는 이제 깨지지 않는 얼음처럼 보였다.
트라팔가. 키드의 부름에 로우는 고개를 들었다. 키드는 며칠 전부터 그를 불쾌하게 했던 어떤 어색한 점의 실마리를 드디어 붙잡은 채였다. 그는 로우에게 질문했다.
“내게 무슨 짓을 했지?”
로우는 나직하게 웃었다. 한 쪽 입꼬리가 조금 더 높이 올라가는, 그 기색부터가 제멋대로 비뚤어진 미소는 수년간 몇 번이고 보았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키드의 심장을 불편하게 찔러오는 구석이 있었다. -대답해. 키드의 목소리는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채였다. 로우는 그를 노려보는 붉은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가 키드에게 한 일을 말해주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가 꿈에서 몇 번이고 보았듯 그의 목을 산 채로 잘라 가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유스타스 키드의 열망을 온전한 형태로 얻을 수 없었다. 키드에게 답변을 돌려주기까지의 3일 동안 트라팔가 로우는 그의 상상력을 바닥까지 헤집으며 그가 원하는 것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가지기 위한 수많은 방법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흘간 로우는 밤마다 그의 크루가 갑작스러운 수면에 염려를 표할 만큼 깊게 잠들곤 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눈을 뜬 로우는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고, 바로 키드에게 전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오만함이 증명하듯 키드가 부하들을 내버려둔 채 단신으로 섬에 상륙하는 것을, 로우는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그의 룸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그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의 글씨만큼이나 명확하게 쓰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에 로우는 키드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문이 열리는 순간 로우는 그 자신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지막히 속삭였다. 섐블즈.
“의식의 공유라는 말은 적절치 못하군. 무의식까지도 연결되었으니까.”
로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키드 쪽으로 다가왔다. 키드는 로우가 말한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로우는 생각에 잠긴 듯 약간 인상을 쓴 채로 말을 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너와 내 뇌를 완전히 섞어버렸다고 하면 비슷할까? 실제로 머릿속을 휘저은 건 아니니까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말이야. 럼으로 칵테일을 만들기라도 했다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는 어조였다.
네가 본 꿈은 어땠지? 로우는 질문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키드는 알 수 있었다. 지난 사흘간 그를 잠식하던 불쾌한 기시감과 두통의 이유를, 그리고 어째서 그가 매일 밤 로우의 꿈을 꾸었는지를. 그가 꿈에서 느꼈던 모든 상념과 감정, 구체화된 무의식의 수많은 형태의 근원. 그것은 유스타스 키드가 욕망하고 상실했던 것인 동시에 트라팔가 로우가 잃어버렸고 원하는 것들이었다.
그의 추억, 이제는 썩어 없어졌을 그 몸의 일부, 그에 담겨 있던 기억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사건들. 아주 어렸던 시절, 처음 바닷물이 몸에 닿았던 순간의 서늘하게 젖어드는 감각. 그 바다 너머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을 강렬하게 욕망하기 시작했던 때의 기억. 그리고 악마와의 거래 후 그 바다가 죽음의 공포로 다가왔던 순간의 상실감. 키드는 꿈에서 보았던 모든 것을 쉽게 놓아버릴 것만 같았던 금빛 눈과 그의 손 아래에서 너무나도 쉽게 사그라들던 맥박을 기억했다.
-유스타스 키드. 로우가 발음하는 그의 이름은 어쩐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단어처럼 들리는 구석이 있었다. 트라팔가 로우 특유의 말버릇이 떨어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사소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식을 필요로 하는 거슬림이었다. 마치 살아가며 단 한번도 그 존재를 부르기 위해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할 필요가 없는, 그 스스로의 이름을 말하는 것과 같은 부자연스러움. 키드는 불편할 정도로 가까워진 채 조금 낮은 곳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로우를 보았다. 오만하게 타오르는 금빛 시선은 키드에게 익숙한 것인 동시에 그가 알던 것과 완전히 멀어진 색이 스며들어 있었다. 로우가 말을 이었다.
“갖고 싶었거든, 어떻게든.”
키드는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그가 오래 전부터 열망하던, 오로지 그의 것이 된 바다에서 그의 소유물로 만들고 싶었던. 그리고 이제 그의 의식을, 또 무의식의 세계를, 유스타스 키드의 자아를 제 것으로 만들어버린 남자. 키드가 로우의 눈 안에서 읽은 것은 되돌아온 열망이었다. 과거 어느 시점에 죽어버린 트라팔가 로우 본인의 것이 아닌, 키드에게 오랫동안 속해 있던 탐욕이었다. 트라팔가 로우가 살기 위해 탐냈고, 결국 키드로부터 빼앗은 것이었다.
키드는 그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계의 바다를 모두 정복하고 싶은 그의 열망은 단 한 순간도 꺼진 적이 없는 불꽃이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살육하고 파괴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태우게 될 위험함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평화로운 바다는 그를 침잠시켜 질식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허우적대도 가라앉기만 하는 깊은 물처럼. 그렇기 때문에 유스타스 키드는 밀짚모자의 선장이 왕의 이름을 갖게 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스스로를 산화시켜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아야만 했다.
유스타스 키드는 트라팔가 로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무언가를 깨달았고, 그것을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키드는 로우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나?”
“아니.”
로우의 대답은 빨랐다. 처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파괴하는 건 네 녀석의 특기였지. 유스타스야. 다시 익숙한 호칭이었다. 로우의 손이 다가와 키드의 심장이 있는 위치에서 바로 앞에서 멈췄다. 키드는 로우의 손을 제지하지 않았다. 검은 알파벳들 중 도드라지는 E가 새겨진 곧은 손가락이 정확하게 고동치는 심장의 바로 위를 짚었다. -이제는 나를 죽여도,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트라팔가 로우가 죽으면 유스타스 키드의 일부도 로우와 함께 죽는다는 뜻이었다. 키드는 다시 질문했다.
“내가 죽으면?”
로우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키드는 로우의 시선에서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흥미를 읽었다. 혹은 로우의 눈동자에 비친 그 자신의 새빨간 눈동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로우는 대답했다. 내 것을 가진 채로 죽게 둘 수는 없지. 그 대답은 키드를 꽤나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키드에게 확신을 주는 답변이었다.
트라팔가 로우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가장 하찮은 조각마저도 제 소유가 아니면 견딜 수 없어하는 남자였다. 그것이 설령 그를 죽이고 있던 생의 무력감이라 할지라도. 키드는 이제 분명하게 그의 안에서 빙하처럼 얼어붙은 트라팔가 로우의 권태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제 유스타스 키드의 가장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거대한 열망을 적당히 식혀 줄 것이었다. 그가 스스로의 심장을 태워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나 더 알려줄까? 그렇게 말하는 로우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의도 악의도 아닌, 그저 이 모든 상황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제 심장에 닿아 있던 상대의 손가락을 보고 있던 키드의 시선이 다시 로우와 마주했다.
“이건 네 꿈이 아니야.”
로우의 손끝이, 키드의 심장 안으로 파고들었다.
9.
키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주변의 광경이 그가 머무르던 방과는 다르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의 허리 아래를 감싸고 있는 이불부터가 달랐다.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던 새하얀 시트 대신 아무런 문양도 없는 검고 두꺼운 소재의 천은 그가 자주 입는 모피처럼 열을 머금고 있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은 방은 어두워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한 책장이나 유리병 같은 것들이 얼핏 보였다. 소독약 특유의 인위적인 향이 났다. 큰 창을 가린 커튼 사이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키드는 방 안의 온도가 꽤나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방의 주인은 추위를 많이 타는 모양이었다.
트라팔가 로우는 방의 따스한 온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운 것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무방비하게 보이는 그 모습은 키드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얕고 고른 숨소리. 키드는 로우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키드는 로우가 꿈에서 했던 말을 생각했고, 로우가 그에게서 빼앗아간 것과 그가 로우에게 받은 것을 생각했다.
키드의 상념이 길어진 모양인지 어느새 로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키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창 밖의 날씨를 본 로우는 다시 푹신하게 가라앉는 침대 위에 머리를 묻었다. 이 섬의 눈보라는… 며칠씩 계속되지. 여전히 잠기운이 남은 목소리였다. 로우는 나른하게 흩어지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눈이 그칠 때까지, 머무르다 가도 좋아.”
“네놈의 허락은 필요없어.”
“그렇겠지.”
더 자도록 해. 로의 팔이 키드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꿈 탓에 전혀 잠을 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키드는 기꺼이 로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몸을 눕히고 눈을 감기 전, 키드는 무엇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손님방의 온도가 너무 낮더군. 키드의 불평에 로우는 이미 다시 반쯤 잠든 채로도 짧게 웃은 후 대답했다.
“말했잖아. 여기 머무르다 가라고.”
키드는 인상을 찌푸린 후 눈을 감았다. 로우의 침대는 따뜻했지만 그의 몸에 닿아 있는, 그보다 조금 낮은 체온이 그의 온도를 빼앗아가는 감각이 기묘했다.
유스타스 키드는 아주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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