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일로레이
* 카일로와 레이가 선악의 의미가 없어지는 곳에서 고통받는 이야기
* 소재주의
* 온갖 설정 날조주의 설명충주의...
* 사실 쓰고싶은 모든 장면은 다음편으로 떠넘겨버림 힘내라 미래의 나
* 제목은 더네이버1후드의 에브리바디스웟췽미로부터
let you find it on your own
上
1.
대체 언제부터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보다 제 삶은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
레이는 그 시작을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2.
정신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눈이 타들어갈 것처럼 밝은 빛이었다. 이제는 기억에만 남은, 사막을 달구던 태양의 열기와는 다르게 인공적이기 그지없는 차가운 백색이 얇은 눈꺼풀을 뚫고 검은 시야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눈을 깜박이자 바싹 말라붙은 눈가가 쓰라렸다. 눈물을 만들어낼 수분조차 남지 않은 것처럼 건조한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간신히 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정신과 신체의 연결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몸은 지독히도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른 입 안에는 금속의 맛이 엉망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신경이 끊긴 것처럼 고요했던 청각이 되살아나며, 지독한 소음이 오감을 짓눌렀다. 정신이 제대로 들자마자, 레이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졌던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빛에 적응된 눈이 볼 수 있는 범위를 늘려가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려 조바심이 났다. 반사적으로 손을 짚은 허리춤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소리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와 묵직한 기계음, 전기가 튀는 듯한 거슬리는 노이즈의 불협화음만이 그녀의 정신을 예민하게 갉아먹고 있을 뿐이다.
여긴 어디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레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쓰러져 있던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물기 하나 없는 희고 거친 모래로 덮인 땅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기억하는 장소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듯 그 메마름에도 불구하고 날리는 모래바람은 없었다. 그 장소에서 이질적인 것은 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검은 기둥뿐이었다. 그 기둥을 따라 고개를 들어 지나치게 밝게 쏟아지는 빛의 광원을 찾은 레이는 그제서야 그녀가 태양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수십 개쯤 설치된 조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를 괴롭힌 소음의 근원은 조명의 근처에 존재하고 있었다.
거대한 스크린들. 조명 위치와 맞지 않는 탓에 화면의 내용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레이는 그것들이 꽤나 오래된 테크놀로지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항군에서도 시설이 낡은 행성에서나 쓰는 모니터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던 탓이다. 목소리, 아니, 목소리들은 그 화면으로부터 재생되는 소리였다. 기계음에 묻혀 잘 구분되지 않지만 화면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인영들의 수는 한둘이 아니었다. 시선을 내리던 레이는 그제서야 그녀의 주변이 높고 검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서져 가는 기계와 금속들로 이루어진 벽이었다. 출구처럼 보이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무언가 설치된 것처럼 끔찍한 소음들만이 새어나오는 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있던 이 모래사장이 지나치게 넓었던 이유도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이 장소는, 마치-
"투기장이지."
레이는 고개를 휙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와 포스는 이미 그 나지막한 저음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이미 규명하고 있는 채였다.
카일로 렌은 레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들을 관조하는 거대한 모니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그의 희고 창백한 얼굴은 밝은 빛 아래서 기묘할 정도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색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갑주와 로브 대신, 그의 상반신은 나신이었다. 먼 거리에서 봐도 뚜렷하게 모양이 잡힌 어깨나 그 골격이 그리는 선이 만드는 카일로 렌의 맨몸은 그의 얼굴처럼 창백해서, 오히려 마스크를 썼을 때보다 더욱 인형처럼 보이는 데가 있다. 정교하게 조각된 밀랍인형처럼, 녹슨 관절을 굴리듯 렌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여 레이 쪽을 향해왔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보다 더 검은 눈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다. 레이는 침착하게 가장 효율적인 질문을 떠올리려 애썼다.
"아는 걸 설명해."
"정신이 들었을 땐 여기였고, 저들은 네가 깨어나길 기다렸던 것 같군."
레이는 본능적으로 제 포스를 써 카일로의 정신에 파고들었고,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카일로는 일부러 제 방비를 풀어둔 것처럼 그녀의 접근을 받아들였다. 얻으려던 정보 외에도 남자가 가진, 지나친 감정의 소용돌이가 제 안을 헤집는 레이의 포스에 늪처럼 엉겨왔지만 레이는 애써 무시하며 힘을 거뒀다. 카일로 역시 그녀만큼이나 아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포스의 영향은 상대가 사용자의 시야에 존재한다면 가능한 힘이지만, 지나치게 먼 거리의 모니터를 통해 정보를 얻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말을 의심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목에 장식이 하나 달렸지."
카일로의 긴 손가락-레이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새하얗고 단단한 선을 가진-이 스스로의 목을 짚었다. 레이는 그제야 남자의 목젖 위에 족쇄처럼 감겨 있는 금속덩어리를 볼 수 있었다. 제 목을 더듬자, 그녀의 체온과 비슷할 정도로 데워진 얇은 금속의 띠가 잡혀왔다. 무게감이 없이 달라붙어 있는 경계를 따라 아무리 더듬어도 이음새가 만져지지 않는다. 대신 경동맥 쪽을 스치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황급히 손을 떼어낸 레이는 잔뜩 세운 긴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동시에 그 물건에 남은 포스의 흔적을 살폈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적의가 새겨진 물건이었다. 누가 되었든, 레이와 카일로 모두에게 적의를 가진 인물이 한 짓이다. 레이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어느 누가 퍼스트 오더와 공화국 양쪽 모두에 적의를 갖는단 말인가?
레이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카일로의 포스가 도화선을 타고 오르는 것처럼 레이의 손목을 타고 기어 올라온 탓이다. 둘 사이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은 채였지만 남자의 불길처럼 뜨겁고 아픈 강제는 레이의 정신에 언제나 화상처럼 닿아오는 종류의 것이다. 카일로의 포스는 그녀의 목을 한 번 감고 나서 식어버리듯 사그라든다. -같군. 남자의 혼잣말 같은 생각이 멀어지는 메아리처럼 울렸다. 물리적인 것에 대한 간섭이 능숙한 남자와는 달리 그녀의 포스는 심리적인 것들에 예민하다. 그리고 레이는 그녀가 쓰러져 있는 동안 남자가 제 쪽으로 단 한순간도 다가온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으나 그 사실에 대해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검은 벽들에서 울리던 기계음의 합주는 갑작스럽게 멈췄다. 레이는 카일로의 어깨와 팔을 따라 그려지는 근육의 선이 바짝 긴장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 역시 스스로의 오감에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다. 언제나 몸을 두르고 있던 몇 겹의 천이 없어진 것보다도 완벽하게 무장이 해제되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다는 감각이 레이를 숨막히게 했다. 제 몸의 어느 한 구석도 단단하게 감싸 지키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는 저 남자는, 심지어 스스로의 이름에조차 방어구를 씌운 카일로 렌이라는 남자에게 이 상황은- 레이는 빠르게 잡념을 끊고 언제든 어느 방향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자세를 다잡았다. 제 주인의 긴장만큼이나 역치가 낮아진 레이의 포스는 제가 읽을 수 있는 걸 전부 읽으려 들고 있었다. 이래서야 폭력과 다를 바가 없다. 설령 상대가 무차별적인 파괴로 모든 것을 제압하려 드는 남자였을지라도.
[퍼스트 오더의 기사단장과 제다이 나이트라. 오늘 수확이 좋군요.]
기묘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필드 내에 울렸다. 흔히 대부분의 은하에서 인간 종족이 쓰는 공용어였으나 성별도, 나이도, 심지어는 그 종족마저도 짐작할 수 없게 조작된 소리였다. 침묵하는 벽의 소리 대신 그들을 밝히는 조명의 빛과, 이제는 그 윤곽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니터들에서 울리는 웅성거림들이 강해졌다. 웃음소리? 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천정은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카일로 렌의 꽉 쥐어진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포스를 쓰지 않아도 그가 분노하고 있음은 명확하다.
카일로는 천천히 레이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녀를 위협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무언가를 시험하는 것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카일로가 향한 쪽의 벽면에서 지잉, 하고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카일로는 레이를 지나쳐 그녀가 등진 기둥으로 다가갔다. 그의 포스가 영향을 충분히 줄 수 있는 거리와 미지의 벽이 가할 위협의 경계쯤을 가늠하는 듯한 접근이다. 레이는 눈으로는 카일로의 행동을 보며, 귀로 들리는 소리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박수와 웃음. 기대? 기대에 차 있어? 레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카일로의 펼쳐져 있던 손이 오므라듦과 동시에, 기둥의 벽면으로부터 무언가 깨지는 소리들이 났다. 이어 천장의 모니터 중 두 개가 점멸했다.
[신사분께선 소문대로 난폭하기 짝이 없고...]
거기 어린 아가씨는 어떻습니까? 볼 수 없을 만큼 밝았던 조명의 일부가 오로지 그녀를 향해 집중된 것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으나, 레이는 그 순간 그녀를 향한 그 모든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목에 감긴 족쇄의 존재감이 혐오스러울 만큼 생경하게 느껴진다. 거기에 담긴 것은 적의 같은 게 아니었다. 무서울 정도의 악의다. 누군가를 특정지어 사로잡기 위한 것이 아닌, 제 손에 들어온 것들을 철저하게 유린하기 위한 악랄함이다. 그들을 감싼 벽과 그 정체를 규명할 수 없이 밝은 빛, 솟아오른 거대한 기둥은 그들을 지켜보기 위한 기계들로 가득하다. 기둥이라는 말은 이제 적절하지 않다. 그 기능은 지탱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레이는 그 순간 이 장소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곳은 투기장 따위가 아니다. 원형의 감옥. 중앙의 감시탑. 감시당하는 대상은 지켜보는 자의 유무조차 알지 못한 채 짓눌릴 수밖에 없는 구조. 그들은 파놉티콘 안에 갇혀 있었다. 레이를 향해 뜨겁게 쏟아졌던 스포트라이트는 다시 여러 개로 흩어지고, 누군지 알 수 없는 감시자가 일그러진 목소리로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엉망진창으로 휘둘러지는 카일로의 손끝을 따라 모니터 몇 개가 더 터져나갔으나, 그 귀에 거슬리는 조소는 한참이나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3.
이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습니까?
언젠가 소년은(남자는) 그의 스승에게 물었다. ‘어느 시절’의 스승인가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답변은 같았다. 받아들여라.(그것을 너의 힘으로 삼아라.) 벤 솔로는(카일로 렌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의 포스는 정신 안에서 흉포하게 몸부림친다. 스스로도 규명하지 못하는 불안, 찾아오지 않은 모든 일들에 대한 고통. 그의 정신은 연약하고, 수십 번씩 부서져간다. 이념과 의미로 점철된 삶이란 괴로운 것이다. 전 은하를 대상으로 하기에 인간 하나란 사실 지독하게 무력하고 개미처럼 미개한 존재였던 탓이었다.
다행히도 그를 찾아온 포스와 그의 스승, 그가 실제로 만난 적 없던 조부와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에서 만난 소녀는 스스로의 결핍에 날을 박아 그를 더 지독한 고통으로 추락시켜 주었다. 그 상처에 피가 차오르는 정신적 만족감에 취해, 카일로 렌은 제 질문에 대해 스스로의 안에 안주하는 무언가가 속삭였던 답변을 잊곤 했다. 멍청하긴.
어차피 죽으면 끝일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는 걸 그만두면, 모든 게 편해질 텐데.
잠들기 직전, 혹은 숨이 차 죽음이 가까워졌던 순간마다 그 속삭임은 되살아나 귓가에 독처럼 엉겨붙어 왔다. 악의로 가득 찬 우매한 유혹이다. 그에겐 이제 면역이 되어가는 빛의 유혹보다도 더욱 질이 나쁘고 질척한 종류였다. 카일로는 눈을 감고, 그의 이름이 갖는 모든 가치를 부정하려 드는 배부른 가축을 다시 한번 베어 죽였다.
4.
분노하기는 쉬웠다. 그래서 카일로 렌은 그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분노했다.
그의 목에 뱀처럼 감겨든 족쇄의 정체를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의 포스가 필드의 장치를 망쳐놓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목부터 척추를 타고 쇼크처럼 전기가 흘렀던 것이다. 의식이 끊긴 것은 순간에 불과했으나 카일로 렌에게 그 장치가 경추 사이의 신경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움직임을 제한하기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인지와 집중을 요구하는 포스의 사용에는 치명적일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이 은하에 몇 없는 포스 유저를 노린 족쇄는 아니었겠지만, 이 정도의 하잘것없는 금속 덩어리에 스스로의 움직임이 제한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가 갈릴 정도의 굴욕이었다.
스스로의 분노에 집중하는 것은 그의 머리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밖의 환경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당한 공간에서 방치된 채였기에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려웠으나, 이곳에 갇힌 지 약 이틀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리라고 카일로는 생각했다. 파놉티콘의 감시자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구경꾼의 무리가 나타난 것이 총 두 번. 두 번째로 나타난 기계음은 선고하듯 말했다.
괴로워하라. 그것이 너희의 오만에 대한 처벌이 될 것이다.
첫 번째의 감시자와 다른 인물인 것만이 확실했다. 흘러넘치는 감정의 종류가 달랐다. 신체로 이어지지 않고 의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포스의 행사는 가능했기에 카일로는 제게 흘러드는 감각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타인의 정신을 가르고 들어가 약탈하는 데엔 익숙하지만, 그에 담긴 감정이나 의도를 읽는 것은 그런 것에 공감하지 않는 카일로 렌이라는 남자에겐 영 어설픈 종류의 일이다. 어느 누가 가축을 도살하며 그 짐승이 느낄 슬픔을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돼지들의 울음소리에도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위인도 있기 마련이었다. 카일로의 분류체계에서 바로 그 탐탁찮은 인간들 중 하나에 속하는 소녀는 몇 시간 째 눈을 감은 채로 명상에 잠겨 있다. 물도, 음식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과 메마른 모래들, 한 순간도 어두워지는 일 없이 내리쬐는 강렬한 빛. 카일로는 머나먼 예전의 일처럼 느껴지는, 이제는 제다이가 된 소녀가 제 정신의 빗장을 닫는 법을 모르던 시절 읽었던 풍경을 떠올렸다. 생명력의 흔적이 점점 말라붙어가는 외로운 사막 행성이 그녀가 떠나온 별이다.
카일로는 고인 물처럼 침묵하는 레이의 정신을 보았다. 수면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지나치자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 있었다. 카일로 렌이 가진 어떤 결핍을 자극하는 고독이 존재하는 장소였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쌓아올린 연약한 벽 안에 숨겨진, 외롭고 불안한 정신을 가졌던 소녀는 이제 저항군의 전선을 이끌며 전 은하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기사가 되었다.
그렇지만. 카일로 렌은 어떤 사실을 의심한다. 그것은 그 스스로가 렌 기사단을 이끄는 전사가 된 후에도 그의 마스크 뒤로 감춘 무언가로부터 기원했다. 카일로의 손끝이 차가운 푸른빛으로 빛나는 레이의 정신에 서서히 잠긴다. 수면이 일렁이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드러움은 역시 그에게는 능숙한 것이 아니어서, 침입을 인지하자마자 레이의 정신은 빠르게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린 통증만이 남았다. 명상을 방해당한 소녀의 눈동자가 카일로의 시선과 마주친다. 물을 마시지 못해 바싹 마른 얇은 입술이 곧은 직선을 그리며 다물렸다가 벌어졌다. 잠들지 못해 조금 피곤한 기색이 섞인 목소리가 그를 향해왔다.
“할 말이 있으면 해. 소름끼치게 하지 말고.”
“독설이 늘었군. 그 파일럿이 가르쳤나?”
“이 정도가 독설이라면 퍼스트 오더의 수준도 알만하네.”
“대부분은 말하기 전에 죽었으니까.”
“그러시겠지.”
레이는 몸을 일으켜 몸에 묻은 모래들을 툭툭 털어낸 후 카일로와 좀 더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카일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몇 시간 후면 또 이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서로에게 가끔 포스로만 닿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약 이틀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아주 드물었고, 이런 상황에서 쓸모없는 잡담을 할 필요성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카일로는 레이의 정신이 얼어붙기 직전 어렴풋이 보았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감옥에 갇힌 채 굶어 죽어가며, 소녀는 쓰레기처럼 시궁창을 뒤져 하루를 연장하는 삶을 살았던 시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카일로 렌이 단 한 번도 실제로 체험해본 적 없는 어떤 현실적인 고통의 집합 같은 것이다. 포스라는 것이 개입하기 이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에의 고민. 스스로가 인간임을 깨닫기 전 진흙탕 속에서 숨을 쉬려 애쓰던 동물의 유년기. 카일로는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생소함임을 조금 늦게 깨닫는다.
얼굴 없는 군중은 그와 소녀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수확, 이라는 단어는 이 감옥에서의 처벌이 한두 번 일어난 것이 아님을 시사했다. 어제의 감시자는 오만을 이야기했던가.
그 순간 이제는 익숙해진 기계음이 천정에서 울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레이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로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가장자리부터 켜지는 모니터들. 더욱 강해지는 조명의 백열이 바싹 마른 안구를 바늘처럼 찔러왔으나 카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필드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검은 기둥이 공명하듯 울렸다. 감시자의 세 번째 방문이다. 혹은, 지켜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신호이다. 하지만 이전의 두 번과는 무언가 다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양자택일의 기회를 드리죠.]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변조된 기계음은 가청 주파수의 모든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몇 겹으로 겹쳐 울렸다. 레이가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 모습이 보였다. 카일로는 ‘시선’이 그를 향해오는 것을 느꼈다. 카일로 렌, 퍼스트 오더의 전사.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언제나 규칙은 더 오만한 쪽이 결정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거만한 자살과 비참한 생의 연장, 어느 쪽이 좋습니까?]
“설명해.”
[그 소녀를 죽이면 당신의 라이트세이버를 돌려드리죠. 그걸로 자살하시면 됩니다.]
“나쁘지 않군. 다른 선택지는?”
[제다이 나이트를 범하십시오. 그럼 물과 먹을 것을 드리겠습니다.]
새하얗게 질린 시선과 경악한 정신이 그의 날선 포스 끝에 닿아왔으나 카일로는 그를 내려다보는 감시자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감시자 주변의 수많은 모니터들에서 킥킥대는 노골적인 웃음소리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가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지독할 정도로 순수한 악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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