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포스도, 저를 바라보는 눈에도 일말의 흔들림이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는 그가 단 한번도 빠져 죽지 못했던 바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피부가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건만 타인의 체온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질적이어야만 했는가를 고민할 여유도 없다. 색이 죽어버린 카일로 렌의 창백한 피부에 비해, 소녀의 온도에는 사막 같은 열기가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빛이다. 누군가에게는 체온을 데울 정도의 따스함이었겠지만, 제 안을 파먹는 불길 외엔 알지 못했던 남자에겐 언제나 벌레를 부르는 촛불처럼 그를 아주 바깥의 껍질부터 태워죽일 정도의 뜨거움이다.
카일로 렌은 그것에 자학적 즐거움이라는 기묘한 관념어를 붙여 보았다. 제 안에 이렇게도 많은 물이 있었던가. 모두 태웠다고 생각했는데도, 눈앞의 존재 앞에서는 쉴새없이 메말라 가는 스스로란 그저 놀라울 정도였다. 고통은 끝이 없고, 그가 떨어질 수 있는 나락은 이다지도 깊었다. 그리고 그의 심연을 최후까지 규명해줄 상대는 눈앞의 이 강하고 외로운 빛이다.
잘못 알고 있군.
카일로는 그녀가 끝까지 놓지 못하고 있던, 부서진 라이트세이버의 조각을 손쉽게 그의 포스로 빼앗아 부쉈다. 금속이 우그러지는 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치밀하고, 이미 파괴된 녹청의 광물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불안정한 라이트세이버 역시도 그녀의 검을 파괴하며 이미 쓰레기가 되었으나, 언젠가는 스스로 부서지고 말 물건이었다면 그의 죽음보다 앞서 죽는 것이 옳았다. 먼 발치에서 치직대며 붉은 스파크를 뱉는 크로스가드 라이트세이버의 잔해만이 이제 둘 사이의 유일한 소음이다. 레이는 카일로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의 다른 한 손은 카일로 렌의 새하얀 목에 닿아 있었다. 언제든지 그녀의 포스가 실패하지 않고 남자의 목을 졸라 버릴 수 있는 거리였다. 카일로가 말할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닿은 그녀의 손바닥으로 남자가 만드는 저음의 진동이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너는 강해지기 위해서,
카일로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레이의 작고 거친 손바닥에 그의 목이 완전히 감겨들고,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저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부드러운 이마 위로 떨어진다. 시선은 마주친 채로, 얽힌 것처럼 피할 수 없다.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카일로는 말했다.
나를 찾아오지 않나.
정신은 느릿하게 섞였다. 한 번 가장 깊은 외로움과 고독까지 들킨 마음은 이미 길이 알려진 숲처럼 파고들기가 쉬웠다. 대신에 그녀는 제 안으로 파고드는 남자의 유약한 감정을 비참할 정도로 무섭게 조각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 관계에서 부서지는 것이 누구인가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레이도, 카일로도 알고 있었다. 소녀는 남자가 가진, 오만할 정도로 인간적인 면모를 오로지 그녀에게만 허락된 힘과 권리로 부수며 강해진다. 원석이 다듬어지는 것처럼 레이의 빛이 점점 밝아져 그 밑에 무엇도 보이지 않을 그림자를 만드는 것을 보는 게 허락된 것도, 오로지 그뿐만이다.
카일로의 목을 쥔 소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그의 피부에 파고들며 둔한 통증을 남기는 감각이 생경했다. 포스가 스며있지 않은 악력은 그저 약한 동물의 그것이나 다름없다. 아직도 그녀는 저를 죽일 만큼도 강해지지 못했다. 카일로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물기 없이 메마른 소녀의 눈동자 안에 비친 스스로를 보았다. 흔들림이 없는 어둠이다. 언젠가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심장에 제 라이트세이버를 찔러 넣을 수 있는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
혹은 언젠가는.
언젠가는 제 주인의 라이트세이버보다 날이 선 포스에 스스로의 팔다리가 불타 사라지는 상상을 하며, 카일로는 천천히 레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며칠은 갈 정도로 검푸른 손자국이 짙게 남아 있을 것이다. 저를 붙잡던 카일로의 손이 사라지자, 레이 역시 카일로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멀었다. 카일로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소녀의 손톱 끝이 박히고 간 목덜미의 상처 몇 개에 제 손끝을 새겨넣는다. 다시 만나는 날에는 이미 사라져 있을 상처겠지만, 그녀와 그 사이에 이루어진 수많은 조우에서 서로에게 남기는 것은 언제나 이 정도가 좋았다. 그의 부서진 정신의 조각들이 소녀의 정신에 남아 있는 것도, 결국은 모두 불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