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not that kind of love
윈트(Wnt)
2016. 4. 23. 18:52
* 영화 스포일러 주의
* 날조주의
* rating T? M?
* 에그시해리지만 에그시->해리에 가깝습니다
(15. 03. 02 백업)
1.
에그시 언윈이 그 허름한 펍 안에서 해리 하트에게 시선을 처음 빼앗겼던 순간으로 되돌아가보도록 하자. 솔직히 그 어린 청년에게 있어 몸에 제 피부처럼 달라붙어 있는 수트를 입은 늘씬한 중년의 남자는 예쁘장한 도자기 인형과도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살아있다고 말하기엔 그 얼굴에 패인 옅은 주름 하나까지도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것 마냥 단정했던 탓이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 에그시 언윈이란 인간이 살아온 밑바닥 인생을 말하는 그 입술마저도 불쾌했던 것이다. 곱게 자란 귀족가의 도련님, 그 검은 우산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은 평생 없었을 게 분명한.
그리고 10분 후, 제 맥주잔을 비우고 한숨을 쉬는 남자는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기네스를 마시고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에그시 언윈은 뒤늦게 후회했다.
2.
어린 남자들의 욕망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그렇듯 절제되지 않는 것들이라서, 귀족가의 자제들이라고 해도 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겉으로 규제되어 있는 만큼 그 틀 안에서 깊게 파내려간 채 묶인 것들의 형태는 더욱 퇴폐적이고 음침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킹스맨 후보로 추천된 그 귀족 샌님들 역시도 그 자존심만큼이나 엉망진창인 판타지들로 점철되어 있어서, 에그시는 그 가소롭기 그지없는 헛소리들을 들으며 혀를 찼다. 딕비가 주절대는 체위는 10년쯤 일한 매춘부에게 시도해도 불가능할 게 뻔했다. 기껏해야 기숙학교에서 여자랑 몇 번 자봤거나, 제 돈에 낚인 창녀들과 하룻밤을 지내본 게 다일 남자들의 허풍일 뿐이다.
록산느는 제 주변에서 정처없이 떠도는 음란한 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녀의 샴페인 잔을 비우고 있었다. 5차 미션이 끝난 지금, 킹스맨 후보들 중 유일하게 여성인 그녀는 그 미모와 몸매에도 불구하고 제 여성성을 쉽게 눌러 죽였다. 처음에 껄떡대던 다른 남자들도 그녀의 절제된 태도와 능력 앞에 손을 들었고, 그들이 선택한 대안은 그녀를 완전히 남자처럼 취급하는 것이었다. 신사가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여성에겐 친절한 에그시 언윈은 저에 대한 상냥함을 약한 여자를 대우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마는 록시에게 안쓰러움을 느꼈다. 빈 잔에 샴페인을 다시 따라주며, 에그시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중에 동정인 놈이 최소 둘은 된다는 데 JB의 아침밥을 걸겠어."
록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시껄렁한 잡담에서 푸념이 섞인 대화가 이어졌다. 훈련과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던 록시가 말했다. 수트를 입고 싸울 생각은 대체 누가 한 걸까. 그녀는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에그시가 되묻자, 록시는 약간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대답을 피했다. 아하. 감을 잡은 에그시는 씩 웃었다. 야하지, 그거. 제가 말해 놓고도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았다. 해리 하트의 긴 다리가 그리던 선이 생각난 탓이다. 몇 달 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생생한 그 움직임들. 열이 오르는 것은 알코올만의 탓이 아니었다. 록시는 에그시를 보며 짧게 웃었다. 그걸 본 후론, 잊을 수가 없어. 에그시는 그녀가 제 추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3.
에그시 언윈의 이름은 이제 갤러해드였다. 발렌타인의 음모로 무너질 뻔 했던 킹스맨은 아서, 아니, 체스터 킹의 배신과 죽음 이후에도 어떻게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멀린의 공이 컸다. 이 자존심 빼면 시체인 킹스맨이란 족속들은 순혈주의로 찌들어 힙합 스웩의 힘을 빌어 지구를 청소할 바엔 고고하게 멸종하고 싶어했던 탓에 빈 자리가 얼마 생기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갤러해드의 빈 자리는 가장 나중에 채워졌으나 암묵적으로 누가 거기에 앉아야 할 지는 모두의 공통된 동의가 있었다. 여전히 코드네임 없이 맨체스터에서의 미션을 마치고 온 에그시 언윈은 그 날 모임에서 갤러해드의 자리에 앉았다.
발렌타인 사건 이후 그 잔당을 소탕하러 다니느라 록산느와 실제로 재회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수트도 입지 못한 채 대기권까지 올라갔던 그녀였다. 2번 피팅룸에서 동정을 떼여선 안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던 남자가 있었건만, 퍼시발은 록시에게 사과해야 옳았다. 오늘 처음 본, 수트를 입은 랜슬롯은 굉장히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퍼시발과 함께 서 있는 그녀 역시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가 행복해서 다행이라고 에그시는 생각했다.
체스터 킹의 배반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제외하고는 비밀에 붙여졌다. 그에 관련된 자료들은 킹스맨 내에서도 몇 명만이 알고 있었다. 전대 갤러해드인 해리 하트의 사망 역시도 그 자세한 사항은 기밀이었다. 가장 완벽한 기사라고 불렸던 남자가 그 정신과 자존심을 완전히 더럽혀진 채로 죽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사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은폐와 명예를 덧씌워진 채 치러진 장례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수많은 미션에서의 그의 희생과 헌신 외에 유일하게 전해질 그 거짓된 명예마저도 전할 이가 하나도 없다는 데서 에그시 언윈은 지독하게 울었다. 해리 하트가 마음을 주었던 모든 것은 그보다 먼저 죽었던 탓이다. 에그시 언윈을 제외하고는.
사우스 글레이드 교회 사건의 녹화 자료는 전부 폐기되었다. 멀린은 에그시가 보는 앞에서 그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영상을 복구 불가능하게 삭제했다. 이게 마지막 증거다. 정지 화면은 여자의 목에 도끼를 찍어넣던 해리 하트의 모습에서 멈춰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피가 뭍은 수트에도 불구하고 무표정한 얼굴. 무감각한 눈의 냉기가 픽셀들로 찬찬히 분해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에그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린은 말했다. 개에게 총을 쏜 이후로 해리는 단 한번도 불필요한 죽음을 용납한 적이 없었단다. 적어도 이게 그를 아름답게 보내주는 길이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 믿는다.
에그시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틀렸어요, 멀린.
영상의 시작 부분은 언제나 해리 하트가 제 옆의 금발 여자에게 고개를 숙여 속삭이는 장면부터이다. 해리 하트의 시선으로 찍힌 그 영상에는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다. 난 가톨릭 창녀고, 로 시작되는 그 목소리에서 에그시 언윈은 등골이 간지러워지는 듯한 희미한 열기를 느낀다. 그 목소리에 희미하게 배어 있는, 몇 번이고 돌려듣지 않고서는 느끼지 못할 분노는 오늘따라 더욱 더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총구가 겨눠진 여자의 겁에 질린 얼굴, 해리 하트의 긴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서 에그시는 잠시 영상을 멈추곤 한다. 그 때 해리 하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열기가 솟구친다. 바지를 풀어헤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에그시는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른 영상을 찾는다.
발렌타인의 컴퓨터에서 사우스글레이드 교회에서의 녹화 자료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소중한 첫 실험의 성공적 결과를 그 연극적 취향의 남자가 삭제했을 리가 없었다. 물론, 그의 성정상 단 한번도 재생해 보지 못했겠지만. 해리 하트의 시선으로 그 학살을 대면하지 못하는 건 에그시 언윈의 남은 양심 때문이 아니었다. 재생된 불량한 품질의 화면 안에서 단정한 수트에 감싸인 해리 하트의 늘씬한 몸이 빠르게 휘어지며 몇 인간의 목숨을 간단히도 죽였다. 흰 셔츠깃에 튄 붉은 피가 지독하게도 시선을 잡아끈다. 눈 안쪽을 뜨겁게 달구는 것 같은 감각에 에그시는 이를 악물고 바지 안으로 떨리는 손을 집어넣어 제 성기를 잡았다. 이미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단단하게 발기한 채였다.
에그시 언윈은 해리 하트의 모든 것이 더럽혀지는 그 광경에 욕정했다.
첫 마스터베이션에선 쾌감보다 죄악감이 더했다. 제가 안고 있는 이 욕망이, 그 죽은 남자에 대한 애정이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고통만큼이나 심한 죄악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어버린 남자는 말이 없고, 그에게 어떤 매너도 이제 가르칠 수 없다. 그 작은 유심칩 하나에도 쉽게 추락해버린 그 연약함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제가 몰래 품어왔던 동경마저도 이제는 전할 수가 없다. 사람을 살육하면서도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소리가 녹음되지 않는 감시 카메라 대신 첫 영상의 소리를 재생한 채로, 해리 하트가 한때 살았던 집 안이 그에게 살육당하는 인간의 비명과 가끔 희미하게 들려오는 흐트러지는 그의 숨소리, 그리고 제 성기를 문지르며 신음하는 스스로의 짓눌린 목소리로 가득 차게 내버려둔 채로 에그시 언윈은 이미 죽어버린 남자를 생각한다. 화면 안에서 그 효율적이면서도 지독하게 화려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으로 인간을 살육하는 남자에게 욕정한다.
그가 절정에 달하는 건 언제나 최후의 순간이다. 제 손을 끈적하게 더럽히는 흰 액체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화면을 보았을 때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처럼 교회 안에 살아있는 것이 제 자신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제 정신을 차린 채로 혼란과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다. 그 끔찍한 살육의 가해자인 주제에 방금 강간당한 처녀 같은 얼굴을 한, 두 손을 피로 물들인 채로도 그 수트의 단추 하나 풀어지지 않은, 넥타이조차 비뚤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는 해리 하트의 모습이다. 발렌타인에게 강간당하고 죽은 당신을 나는 매일 시간(屍姦)하고 있는거군. 에그시 언윈은 조소한다. 교회를 나가는 장면에서 감시 카메라의 영상은 끝나지만 해리 하트의 시선으로 녹음된 영상의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그 살육판에서도 떨리지 않았던 숨소리가 점점 커진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말은 이제 에그시 언윈을 향하는 것처럼 들릴 지경이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에그시는 수천 번도 넘게 생각했다.